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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추억은 버릴 수 없으니까” 추억을 고쳐 쓰는 사람들

입력
2018.03.28 04:40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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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 하나면 웬만한 고성능 카메라 버금가는 고화질 사진을 찍고, 전세계 거의 모든 음악을 손쉽게 들을 수 있는 시대. 하지만 기술은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절대 담을 수 없는 ‘추억’ 덕에 오래된 물건을 고쳐 쓰는 사람들이 있다. 만들어진 지 수십 년 넘은, 다른 누군가의 눈엔 ‘엿 바꿔먹을 만한 고물’일지 모르는 물건을 소중히 간직하고, 고쳐 쓰는 사람들 얘기를 들어봤다.

신혼의 추억이 담긴 턴테이블

강영국씨가 수리수리협동조합에 수리를 의뢰한 턴테이블. 수리수리협동조합 제공
강영국씨가 수리수리협동조합에 수리를 의뢰한 턴테이블. 수리수리협동조합 제공

종합상사에서 일하다 은퇴한 강영국(70)씨는 턴테이블로 음악을 들을 때마다 아내와 독일에서 보낸 신혼생활이 떠오른다. 지금처럼 쉽게 유럽과 한국을 왕복하기 어렵던 시절 타지에서 4년 넘게 일해야 했던 그는 1979년 당시 31세로 독일 지사 부임이 결정되자 부랴부랴 ‘인생의 짝’을 찾아 나섰다. 다행히 출국 전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독일행 비행기에 함께 몸을 실었다.

‘유럽시장 첨병’ 역할을 명 받은 강씨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하는 사이 독일에 아는 사람도, 정 붙일 곳도 없던 20대 초반 아내는 낯선 타지 생활에 종종 눈물을 보였다. 강씨가 이런 아내를 위로하기 위해 선물한 것이 스위스 T사 턴테이블. 턴테이블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은 아내가 떠안았을 타향생활의 쓸쓸함을 덜어줬다.

문제는 한국으로 돌아온 83년 이후. 강씨 말처럼 “그땐 그저 악착같이 일만 하던 시절”이었고, ‘내 집 마련’의 꿈도 잠시 미룬 채 이곳 저곳 세를 얻어 이사 다니는 부부에게 음악은 사치였다. 거실이 아니라 방구석에 자리 잡은 턴테이블 위엔 먼지만 쌓여갔다. 한국에 돌아온 지 20여 년이 지난 뒤 부부가 꺼낸 턴테이블은 이미 제 기능을 잃은 상태였다.

“전자상가 가서 고치면 된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이런 구닥다리 물건 가져가 봤자, 그 쪽에선 엿장수한테나 줄 만한 고물 갖고 왔다고 생각할 것 같고…” 방치되던 턴테이블은 강씨가 2년 전 반신반의하며 찾아간 수리수리협동조합에서 말끔히 수리됐다. 그 덕에 강씨 부부는 종종 턴테이블로 음악을 들으며 신혼생활을 떠올리곤 한단다.

어머니의 사랑이 담긴 릴테크

신현보씨가 수리수리협동조합에 수리를 의뢰한 릴 녹음기. 수리수리협동조합 제공
신현보씨가 수리수리협동조합에 수리를 의뢰한 릴 녹음기. 수리수리협동조합 제공

신현보(68)씨에게 릴테크는 어머니의 사랑이다. 릴테크는 카세트플레이어로 대세가 넘어가기 전 음향기기로, 기다란 릴 테이프에 녹음한 음악을 다시 재생할 수 있는 기기다. 옛 영화 영사기와 비슷하지만 영상 대신 소리를 기록한다고 보면 된다. 전자 공부를 하던 신씨는 20여 년 전, 청계천에 갔다 우연히 방문한 세운상가에서 1970년대 생산된 이 기기를 중고로 구입했다.

릴테크는 특히나 가족 행사에 유용했다. 음악은 물론, 아이들이 천진난만하게 부르는 노랫소리 등이 릴 테이프에 그대로 녹음됐다. 신씨 어머니가 형제, 자녀, 손주에 이르기까지 한 명 한 명 이름을 불러가며 가족 앞날을 걱정하고 축복하는 기도 역시 릴 테이프 속에 담겼다.

수십 년간 멀쩡히 제 기능을 하던 릴테크가 멈춘 건 신씨가 2016년 이사를 마친 뒤. 갑자기 고장이 났는지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같은 해 7월 18일, 2000년 세상을 떠난 어머니 기일에 다 같이 모인 신씨 형제자매는 어머니를 떠올리면서 “릴테크를 수리하자”고 입을 모았다.

“어머니께선 한 평생 저희 자식들을 걱정 하시며 항상 기도를 해주셨어요. 그 중 저희를 위해 생전에 마지막으로 녹음한 기도가 릴에 있는데 수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씨는 어머니의 기도가 담긴 릴 테이프와 릴테크,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내리사랑을 자식들에게 가보로 남겨주고 싶다고 전했다.

바쁜 아버지와의 추억이 담긴 워크맨

아버지와의 추억이 담긴 워크맨. 유청빈씨 제공
아버지와의 추억이 담긴 워크맨. 유청빈씨 제공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유청빈(28)씨에게 A사 워크맨은 아버지와의 특별한 나들이를 떠올리게 한다. 맞벌이로 바쁜 부모 밑에서 외동딸로 자란 유씨는 혼자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날이 많았다. 유씨가 아홉 살 되던 생일날, 아버지 차를 타고 용산전자상가로 향했다. “그간 아버지와 함께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차 안에서 실컷 나눴어요.” 그렇게 도착한 용산전자상가에서 아버지는 유씨에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여운 오렌지색 워크맨을 선물했다.

박정현, 젝스키스, 백스트리트보이즈… 유씨가 워크맨으로 들은 음악들이다. 하지만 유씨가 13세가 되던 해 등장한 MP3플레이어에 밀린 워크맨은 조용히 서랍장 안으로 들어갔다. 10여 년이 흘러 워크맨을 다시 꺼냈을 땐 이미 테이프를 돌리는 고무가 망가진 뒤였다.

2015년 말 수리수리협동조합에서 워크맨을 수리 받은 유씨는 “단순히 물건을 고쳐준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한 소중한 추억까지 되살려줬다”고 소감을 전했다. 워크맨으로 다시 듣는 건 여전히 초등학생 때 갖고 있던 박정현, 잭스키스, 백스트리트보이즈의 테이프들. 그 음악이 흘러나올 때 유씨는 아버지와 용산전자상가로 나들이 향하는 기분에 젖는다.

사진에 대한 열정이 서린 필름 카메라

추억이 담긴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있는 강대준씨. 강대준씨 제공
추억이 담긴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있는 강대준씨. 강대준씨 제공

대학생 강대준(23)씨에게 필름 카메라는 ‘열정’이다. 강씨는 중학생 때 집안에서 우연히 먼지 풀풀 날리는 옛날 앨범들을 발견했다. 앨범엔 부모의 젊은 시절, 강씨 어린 시절 사진이 담겨 있었다. “평소에도 사진 찍는 걸 좋아했지만, 옛 사진들은 무엇으로 찍었길래 색감이 디지털 카메라와 다를까 싶어서 알아보니 전부 필름 카메라 사진들이었어요.”

그날로 강씨는 필름 카메라를 사기 위한 용돈벌이에 들어갔다. 경남 진주시 금산면 시골에서 자란 강씨는 집안 농사일을 도우며 용돈을 모았고, 2010년 꿈에 그리던 C사 필름 카메라를 손에 넣었다. 1976년부터 제작되기 시작해 지금은 생산이 중단된 제품으로 중고로 구매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N사에서 나온, 상위 레벨의 필름 카메라도 갖고 있지만, 농사일 도와 가며 구입한 첫 필름 카메라에 대한 애착도 상당할 터. 구입한 지 2년이 지나 제대로 셔터가 열리고 닫히지 않자, 서울에 있는 카메라 수리점까지 보내 고치기도 했다.

스스로 현상, 인화 작업까지 한다는 강씨는 사진 관련 학과에 진학해 지금도 사진 공부를 하고 있다. 작은 돈을 모아 구입한 필름 카메라가 강씨 진로를 결정한 셈이다. “필름이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필름 작업을 하고 싶다”는 강씨. 필름 카메라에 담긴 그의 추억은 현재 진행형이다.

손영하 기자 froze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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