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부, 관련법 개정해 도입 방침
노사가 독립적 수탁법인 설립
수익성, 전문성 강화 기대하지만
수급권 보호 위한 준비는 부실
#2
금감원 아닌 고용부가 감독 맡고
담당부서 인력도 10여명뿐
지난 2011년 일본에선 퇴직연금 기금형 운용사인 AIJ자산운용이 매년 손실이 난 것을 감춰오다 총 2,000억엔(약 2조원)의 수탁금 중 무려 90% 이상을 날려버린 사실이 드러나 큰 충격을 줬다. 당시 사건으로 가입자 88만여명이 직접 피해를 입고 노후 빈곤층으로 전락할 위기에 몰렸다. 퇴직연금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 지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국민연금, 개인연금과 함께 안정적인 노후 보장을 위한 3대 축인 퇴직연금에 현행 계약형 제도 외에 기금형 제도를 도입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어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계약형 제도는 회사가 직접 퇴직연금사업자(은행ㆍ보험ㆍ증권사)와 운용 및 자산관리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고, 기금형 제도는 노사가 회사로부터 분리된 수탁법인을 설립한 뒤 퇴직연금 운용을 맡기는 구조다. 그러나 기금 건전성과 안정성을 관리ㆍ감독할 수 있는 체계도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제도가 도입될 경우 자칫 가입자들에게 퇴직연금을 지급하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게 전문가들 지적이다.
25일 금융권에 따르면 정부는 최근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를 도입하는 내용이 담긴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근퇴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이를 통해 앞으론 회사가 계약형과 기금형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한다는 방침이다. 기금형은 수탁기관 내 전문가로 구성된 기금운영위원회를 통해 자금을 운영하는 만큼 계약형에 비해 상대적으로 전문성이 높고 수익률도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기금형은 수익성을 좇는 만큼 계약형에 비해 상대적인 안정성이 떨어질 수 있다. 특히 근로자 수급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기금 건전성에 대한 관리ㆍ감독 체계부터 갖춰져야 하는데도 아직 우리나라에선 이런 인프라가 미흡한 상태다. 실제로 계약형에서는 운용과 자산관리 계약 모두를 외부 금융기관에 위탁하도록 의무화돼 있어 금융감독원이 관리ㆍ감독을 한다. 반면 기금형은 자산보관 업무만 외부 금융기관에 위탁하도록 의무화하고 나머지는 수탁법인이 자체적으로 수행한다. 수탁법인 감독이 건전성 확보의 핵심인 셈이다. 그런데 수탁법인 관리는 금감원이 아닌 고용노동부에서 맡게 된다. 고용부의 현재 담당부서 인력은 10여명 안팎이다. 미국(200명)이나 네덜란드(80명) 등과 비교할 때 크게 부족하다. 결국 감독 사각지대에서 불법 행위에 취약할 수 밖에 없다. 김원식 건국대 교수는 “관리ㆍ감독 미비로 기금을 운용하는 사람에 따라 심각한 도덕적 해이(모럴헤저드)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미국과 영국에선 퇴직연금 지급보증공사 등을 통해 기금 파산을 대비한 최소한의 재원을 보장하고 있다. 일본엔 수탁자 책임을 위반해 발생한 손해를 배상해주는 보험상품도 있지만 아직 우리나라에선 논의조차 없다.
기금형을 도입할 경우 반드시 수익률이 높다고 장담하기도 어렵다. 퇴직연금 확정급여형(DB)의 경우 운용 형태나 수익률과 관계없이 근로자가 퇴직 시 받게 되는 금액은 동일하다. 확정기여형(DC)도 기금ㆍ계약형 모두 근로자가 직접 금융상품을 선택해 운용하는 것은 같다.
오히려 수탁법인 설립과 운영, 전문가 채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 등을 모두 합해보면 기금형이 수익률은 높아도 실질적으로 가입자가 받게 될 돈은 생각보다 적을 가능성이 높다. 김 교수는 “계약형은 일종의 수수료만 내면 되지만 기금형은 법인 설립 시 전문인력 인건비와 사무실 운영비 등이 추가로 들어갈 수 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김성일 KG제로인 연금연구소장은 “계약형의 낮은 수익률이 문제라면 투자원칙보고서(IPS)를 만들고 이를 근거로 적립금을 운용하도록 해 보수적 운용 행태를 개선하는 게 우선”이라고 조언했다.
DB형이 전체 퇴직연금 적립금의 65.8%를 차지하는 등 무엇보다 안정성을 중시하는 국내 현실과 퇴직연금의 특성상, 과도한 수익률을 추구하는 운용방식은 위험성만 증가시킬 수 있다. 특히 미중 무역전쟁이나 북한 문제처럼 국내 증시는 크게 출렁일 수 밖에 없는 변수가 많다. 류건식 보험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퇴직연금은 근로자의 노후를 위한 종자돈이기 때문에 잘못 운영되면 큰 재앙이 될 수도 있다”며 “수급권 보호를 위한 인프라 구축 등 제도적 장치가 충분히 마련된 다음 기금형 제도를 도입해도 늦지 않다”고 말했다. 허경주 기자 fairyhk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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