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별아 작가, 표지석 답사기 엮어
‘도시를 걷는 시간’ 펴내
단종 아픔 서린 영도교 표지석
벼룩시장 구석에 쓸쓸히 처박혀
“일상 속 역사의 숨결 느꼈으면”
장소엔 시간이 쌓인다. 500년 전 그날이 한 켜로, 오늘은 다른 한 켜로, 차례로 포개진다. 그게 역사다. 그 겨울 우리 처음 만난 피카디리 극장 앞에는 너와 나만 아는 역사가 어려 있다. 명성황후가 시해 당한 경복궁 건청궁에 새겨진 건 민족 비극의 역사다. 어떤 작은 역사들은 ‘표지석’으로 남는다. “여기서 벌어진 일을, 여기서 살고 죽은 사람을 잊지 말라”는 뜻을 돌에 새겨 전한 마음.
소설가 김별아(49) 작가는 서울 안팎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 표지석을 찾아다녔다. 표지석에 깃든 역사와 표지석을 찾아 헤맨 사연을 쓴 글 19편을 모아 ‘도시를 걷는 시간’(해냄)을 냈다. ‘미실’ ‘영영이별 영이별’ 같은 역사 소재 소설을 써 온 작가다운 야무진 취재력과 듬쑥한 상상력이 빛난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시리즈의 문학 버전으로도, 서울 도보 여행기로도, 중진 문인의 에세이로도 편안하게 읽을 수 있다. 김 작가를 25일 전화로 만났다.
먹고살기 바쁜 우리는 역사를 제대로 대우하지 않았다. 표지석이 푸대접받은 건 당연했다. 주소 기록만 남아 있거나, 페인트를 뒤집어쓰고 있거나, 불법 주차한 오토바이에 가려져 있는 표지석을 김 작가가 찾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애써 찾아내도 돌만 덜렁 남아 있곤 했다. “시간의 갈피에 숨은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도 엄연한 역사예요. 그런데 우리는 기념관에 모셔 놓고 자랑할 수 있는 대상만 역사로 여겨요. 지나친 역사 엄숙주의랄까요. 도시 디자인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기도 하죠. 표지석으로 스토리텔링을 할 생각을 못 하는 거예요. 경제 논리 때문이라고 하는데, 표지석 같은 소재를 잘 이용하는 게 진짜 경제 논리 아닐까요. 서울은 재미난 얘기를 참 많이 품고 있는데도 재미없는 도시가 됐어요. 그게 안타까워서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폐위 뒤 자살한 남편 단종과 강제 이별한 정순왕후 송씨. 그가 지독한 회한을 삼켰다는 장소인 서울 종로구 숭인공원의 동망봉 표지석에서 보이는 건 아파트와 고층 빌딩뿐이었다. 17세의 단종과 18세의 정순왕후가 작별한 곳인 청계천 영도교 표지석은 부산스러운 벼룩시장 한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어떤 이야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우리는 과연 나아가고 있을까? 나아간다고, 나아지고 있는 것일까?” 김 작가가 메마른 서울을 다니며 던진 질문이다. “사연을 모르면 표지석은 돌덩어리에 불과하죠. 공부하고 표지석을 찾아갔어요. 오래도록 눈을 감고 서서 상상을 펼쳐냈죠. 알고 보면 다시 보여요. 점심 먹고 커피 마시며 다니는 곳들에 깃들어 있는 역사의 숨결을 독자들이 느꼈으면 해요.”
김 작가는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했다. 그런 김 작가에게 ‘역사 소설’ 이라는 수식어가 자연스러워지더니, 이번엔 역사 에세이까지 냈다. “저는 현대가 싫거든요(웃음). 시대 부적응자인가 봐요. 진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경박한 사회가 힘들어요. 자극적인 기사들이 쏟아져 나와서 고통스러워요. 요즘 벌어지는 소설 같은 일들을 보면, 소설가는 정작 쓸 게 없다는 생각도 해요. 소설이 안 팔리는 게 당연해요(웃음). 인문학의 힘은 멈춤의 힘이에요. 모두 달려 나가기만 할 때 누군가는 잠시 멈추자고, 과거를 돌아보자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책에는 이름이 없거나 지워진 여성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사도세자의 비극에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 생모 선희궁 영빈 이씨의 이야기, ‘너의 그 사랑이 잠긴 못’이라는 뜻의, 서울 진관내동 여기소(汝基沼)에 깃든 조선 숙종 때 기생 이야기… “여성들의, 패자의, 약자의 역사는 기록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는다면, 살아 낸다면 그것은 기억된다.” 김 작가는 그 ‘기억’을 찾아내 썼다. 여성 작가인 그는 ‘미투(#Me Too)’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여성 작가 차원이 아니라, 한국에서 여성으로 사는 사람들이 겪는 보편적 문제죠. 성희롱이나 성추행 한 번 당하지 않은 여성이 있을까요. 1993년 등단했을 때, 요즘 문단에서 오르내리는 ‘그런 꼴들’을 봤어요. 요즘 저를 심란하게 하는 건, 제가 피해자이기만 한 줄 알았는데 가해자의 측근이기도 하다는 거예요. 결국 사회 전체의 성찰과 반성이 필요하다는 얘기죠. 사람 대 사람의 싸움, 소모적 폭로전으로 가면 사회 문화를 바꿀 수 없어요.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 ‘재수 없었다’고 여기고 말 테니까요.” 김 작가는 또 다른 비주류 여성을 다룬 역사 소설을 봄에 낸다. 조선왕조실록에 단 몇 줄의 기록으로 남아 있는 노비 이야기다.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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