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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세] ‘구세주’ 엘살바도르, 어떻게 공포의 나라가 됐나

입력
2018.03.24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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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다만세는 ‘다시 만난 세계’의 줄임말입니다. 국제뉴스에서 소외됐던, 그러나 흥미로운 나라들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연재입니다.

“하느님과 백성의 이름으로 간청합니다. 호소합니다. 명령합니다. 억압을 중단하십시오. 불의한 명령이 아닌 양심에 따르십시오.” 1980년 3월24일 오후 엘살바도르의 한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던 오스카 로메로 신부는 강경한 목소리로 정부군에 외쳤다. 하루에도 수십 명의 사람들이 정부군의 폭압 속에 희생되고, 가까스로 살아남는다 해도 처참한 생활을 면치 못했던 때다. 당시 수도 산살바도르 대교구장이었던 로메로 신부는 기득권층임에도,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며 약자의 편에 섰다. 하지만 신부의 저항은 이날 강론을 끝으로 스러졌다. 강론 후 성체를 들며 눈을 감는 순간 무장괴한의 총알이 신부의 심장을 관통했고, 성당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미사를 보던 수녀들과 신자들은 죽어가는 신부를 부여잡고 목놓아 울었고, 망연자실한 일부는 주저앉아 움직이지 못했다.

모두에게 갑작스러웠던 죽음. 하지만 단 한 사람, 로메로 신부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던 듯 하다. 그는 암살당하기 며칠 전 사람들에게 “만약 그들이 나를 죽인다면 나는 백성들 사이에서 다시 부활할 겁니다”라며 “내 피는 자유의 씨앗이 되고 희망이 실현되는 계기가 될 것”이라 말했다고 한다. 실제 그의 죽음은 엘살바도르 사람들 마음 속에 저항의 불씨를 지폈고, 내전의 기폭제로 작용했다. 로메로 신부가 죽어서라도 지키고자 했던 엘살바도르, 그곳은 어떤 나라일까.

엘살바도르의 수도 산살바도르 전경. 수도 한 편에 큰 화산이 우뚝 솟아 있다. 플리커 제공
엘살바도르의 수도 산살바도르 전경. 수도 한 편에 큰 화산이 우뚝 솟아 있다. 플리커 제공

화산재 위에 세워진 나라

중앙아메리카 남서쪽에 위치한 엘살바도르는 ‘불의 고리’라 불리는 환태평양 지진대에 속해 있다. 국토면적이 우리나라 경상남북도를 합친 것(2만9,548㎢)보다 작지만, 그 좁은 땅에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활화산이 무려 23개나 있다. 이 중 일부는 최근까지도 화산재를 내뿜으며 폭발의 징조를 내비쳐 면밀한 모니터링이 필요한 상태다. 2013년엔 엘살바도르에서 세 번째로 큰 차파라스티크 화산이 37년 만에 폭발해 주민 5,000여명이 긴급대피하는 소동이 일기도 했다. 엘살바도르엔 화산 지대를 중심으로 작은 마을들이 꾸준히 생겼다 없어짐을 반복한다. 피해를 입고 떠난 사람들이 새로운 곳에 정착해 또다시 마을을 꾸리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수도 산살바도르에서 40㎞ 가량 떨어진 고고유적지 '호야데세렌'의 모습. 1976년 발굴된 이곳은 이탈리아 폼페이처럼 수천 년 전 화산폭발로 마을 전체가 화산재에 뒤덮인 채 그대로 묻혀 고대 마야문명의 생활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수도 산살바도르에서 40㎞ 가량 떨어진 고고유적지 '호야데세렌'의 모습. 1976년 발굴된 이곳은 이탈리아 폼페이처럼 수천 년 전 화산폭발로 마을 전체가 화산재에 뒤덮인 채 그대로 묻혀 고대 마야문명의 생활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엘살바도르인들에게 자연의 무서움을 일깨워준 화산은 역설적이게도 이들에게 문명의 씨앗을 뿌려준 고마운 존재이기도 하다. 폭발했다 하면 모든 것을 집어삼켜 잿더미로 만들어버리지만, 시간이 지나면 수북했던 화산재 속 유ㆍ무기물이 토양에 스며들어 땅을 기름지게 하기 때문이다. 비옥한 토양은 성공적인 작물 재배의 밑거름이 되고, 식량이 풍족해지면 인구수가 늘기 마련이다. 이는 곧 도시, 문명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실제 엘살바도르는 국토의 90% 이상이 화산활동에 의해 형성돼 농업이 매우 발달했으며 이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돼왔다. 화산 폭발로 묻혔다 1976년 발굴된 고고유적지 ‘호야데세렌’에서도 옥수수 등의 작물을 심었던 밭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엘살바도르의 화산은, 최근엔 관광지로도 각광받고 있다. 에메랄드 빛을 내는 화산호로 유명한 ‘산타아나 화산’과 귀한 운무림(구름이 많은 장소에 발생하는 삼림)이 형성돼 있는 ‘세로 베르데 화산’ 등은 남미를 찾는 여행객들에게 마야유적지 다음으로 매력적인 곳이다.

중미최대 공업국이자 ‘커피공화국’으로 발돋움

이웃 나라들처럼 엘살바도르 또한 약 300여년간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다. ‘구세주’란 뜻을 지닌 엘살바도르 국명도 그 때 만들어졌다. 1524년에 험준한 산맥을 넘어 엘살바도르에 도착한 페드로 데 알바라도 장군이 구세주에게 감사하는 뜻에서 이 같은 이름을 붙였다. 스페인 사람들은 비옥한 이 땅에 목화와 인디고(청색염료인 쪽의 색소)농장을 발전시켰다. 이후 1700년대 들어 농업이 활발해졌으나 토지를 가진 일부만 배를 불렸을 뿐, 대다수의 토착민들은 더욱 굶주려야 했다. 국민의 삶이 끝도 없이 피폐해지자 국부였던 호세 마티아스 델가도가 1811년 스페인의 착취에 저항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내 진압됐다. 철옹성 같던 스페인의 지배체제가 균열을 보이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대서양 너머 프랑스 혁명이 몰고 온 자유주의 바람에 중남미 국가들이 하나 둘 스페인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 엘살바도르도 그 틈을 타 1821년 독립을 쟁취했다. 한때 과테말라, 온두라스 등 중미 5개국과 ‘중미연방공화국’을 결성하기도 했으나 이념 갈등으로 해체되고 1841년 1월 지금의 엘살바도르 공화국이 수립됐다.

엘살바도르의 한 커피 공장. 플리커 제공
엘살바도르의 한 커피 공장. 플리커 제공

독립 후 엘살바도르는 경제적 자립을 위해 농업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켰다. 각광받던 인디고 농장이 합성염료의 발달로 서서히 무너지자, 1870년대부턴 커피 단일경제체제를 확립했다. 커피가 엘살바도르의 전통 수출품목으로 자리잡은 것도 이때부터다. 화산성 토양에서 독자적 기술로 재배해 풍미가 독특한 엘살바도르 커피는 애호가들 사이에선 고급커피로 통한다. 정부가 관리하던 토지를 중심으로 커피를 대량 생산했던 엘살바도르는 1927년까지 ‘커피 공화국’이라 불릴 정도로 중남미 일대 커피산업을 주름잡았다. 이후 경제통합을 위한 중미공동시장(CACOM)이 1960년에 출범하면서 엘살바도르는 본격적인 공업화에 착수했다. 무역 및 금융개방화를 통한 경제다각화를 추진하며 커피 수출 의존도를 줄였고, 당시 중미 최대의 신흥공업국으로 떠올랐다.

12년간의 내전 중 행방불명 된 사람들의 사진을 든 시위대가 산살바도르에서 행진하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12년간의 내전 중 행방불명 된 사람들의 사진을 든 시위대가 산살바도르에서 행진하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모두가 패자로 남은 12년간의 내전

독립국가 설립 때부터 심상치 않았던 엘살바도르의 좌ㆍ우 이념갈등은 쉽게 봉합되지 않았다. 급기야 1931년엔 중도좌파 성향의 아르투로 아라우호 정권이 군사쿠데타로 전복되고 보수우익정부가 세워졌다. 군부는 저항하는 이들을 무참히 살해하며 철권통치를 했다. 일상화된 정치 폭력에 사람들의 삶은 나날이 피폐해졌고, 보다 못한 정치인 파라분도 마르티가 1932년 사회주의 세력을 이끌고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켰다. 엘살바도르 역사에 ‘대학살’로 기록된 이 사건은 3만여 명의 희생자를 낳으며 처참하게 짓밟혔다. 이후로도 빈번한 쿠데타와 함께 정권이 바뀌는 불안정한 상태가 이어졌고, 많은 사람들이 온두라스와 같은 주변국이나 멀리 미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엘살바도르에 있는 어느 집 담벼락에 오스카 로메로 신부의 그림과 그를 추모하는 글이 적혀 있다. 플리커 제공
엘살바도르에 있는 어느 집 담벼락에 오스카 로메로 신부의 그림과 그를 추모하는 글이 적혀 있다. 플리커 제공

군부가 거듭된 정치적 학살과 이권다툼을 자행하는 동안 나라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가난에 고통받는 국민을 외면한 군부는 게릴라 세력을 잡겠다며 ‘암살대’를 만들어 무고한 사람들을 유괴하고 고문했다. 그렇게 민중의 삶은 벼랑 끝으로 몰렸다. 이 때 등장한 사람이 바로 로메로 신부다. 그는 군부독재의 종식을 주창하며, 비폭력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군부와 대화를 시도했다. 많은 사람들이 신부를 따랐고, 그 또한 그들을 신앙으로 보듬었다. 그가 군부의 손에 암살되자 신부를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이 조직화했고, 곳곳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1980년엔 ‘마르티’의 정신을 계승한 반정부 게릴라 단체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FMLN)’이 결성됐다. 이들은 이듬해 1만2,000여명의 무장병력을 이끌고 정부군을 상대로 총공세를 벌였다. 엘살바도르 내전이 본격화한 것이다. 군부와 FMLN 모두 ‘끝’을 보기 전엔 물러서지 않겠단 기세로 국토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거리엔 미처 수습하지 못한 시신이 나뒹굴었고, 굶주린 사람들은 쓰레기 더미를 뒤져야 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내전은 1989년 크리스티아니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는 내전종식을 국가 제일의 과제로 삼고, FMLN에 평화협상을 제시했다. 기나긴 투쟁으로 만신창이가 된 FMLN은 못이기는 척 이를 받아들였으나, 유리한 협상을 위해 무력충돌을 멈추지 않았다. 보다 못한 유엔(UN)이 평화협상에 개입했고, 1992년 1월16일 마침내 엘살바도르 정부와 FMLN 간 평화협정이 체결됐다. 협정에 따라 FMLN이 무장해제하면서 12년간의 내전은 막을 내렸다. 이미 약 7만여 명이 죽었고, 당시 인구의 5분의 1에 달하는 100만여 명이 난민이 된 이후였다.

갱단에 점령된 도시… 누구나 죽을 수 있다

내전은 끝났지만, 그 여파는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정치적 불안정이 지속되면서 갱단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 가장 큰 조직인 마라 살바트루차(MS-13)와 바리오18의 조직원 수만 6만여 명에 달한다. 현재 엘살바도르 인구(642만명)의 약 1%가 갱단 조직원인 셈이다. 군대 못지 않게 무장한 갱단은 이유 없는 살인을 저지르며 범죄를 일상화하고 있다. 때문에 엘살바도르는 전쟁 중인 국가를 제외한 평시 상태의 국가 중 치안이 가장 불안한 나라로 손꼽힌다. 2015년 살인율은 인구 10만명당 104명에 달해 온 국민이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정부가 범죄와의 전쟁에 나서며 지난해엔 인구 10만명당 60.8명으로 떨어졌지만, 살인율은 여전히 매우 높은 수준이다. 이로 인한 경제적 손실도 엄청나다. 호주의 비영리 싱크탱크 경제평화연구소에 따르면 엘살바도르의 폭력에 따른 경제적 손실은 2016년 기준 99억5,000만달러로, 국내총생산(GDP)의 19%에 달한다. 시리아, 이라크 등에 이어 세계에서 18번째로 많은 수준이다.

최근엔 이민자 문제가 엘살바도르인들의 절망을 가중시키고 있다. 엘살바도르는 이민자가 많은 나라 중 한 곳으로, 미국에만 약 25만명이 거주하고 있다. 미국은 자연재해와 분쟁을 이유로 입국한 외국인들에게 ‘임시보호 지위’를 주는데, 엘살바도르 이주민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반이민정책을 주창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말부터 임시보호 지위 철폐와 이민자들의 추방을 공언해 문제가 불거졌다. 미국에서 오는 엘살바도르의 해외 송금 수취액은 지난해 기준 GDP의 17%. 트럼프의 말이 현실화되면, 엘살바도르 경제는 큰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다. 단번에 GDP의 17%가 사라질 수 있다는 의미다. 더구나 이민자들이 한꺼번에 귀국하면 이미 7%에 달하는 실업률 또한 급격히 치솟을 수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다.

김진주 기자 pearlkim7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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