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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나의 아가씨, 나의 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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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나의 아가씨, 나의 아줌마

입력
2018.03.23 11:43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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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여섯 살이 된 조카는 점점 많은 단어를 알아가고 있다. 각각의 단어들은 누군가가 가르쳐 준 의미뿐 아니라, 자신이 그 단어를 말했을 때 상대의 반응까지 합쳐진 의미까지 더해져 아이 기억에 남는다. 몇 달 전, 조카는 한 애니메이션에서 ‘할망구’라는 단어를 배웠다. 이후 장노년 층 여성을 할망구라고 부르면 놀라는 것을 본 뒤 그 반응을 재미있게 느꼈던 듯하다. 다음에는 어디선가 ‘아줌마’를 듣고 와서 청년층 여성을 아줌마라고 부르면 때로 놀라는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을 습득했다. 이후 고모인 나를 “아줌마!”하고 부르고는 이 단어를 어디서 들었고, 또 이런 식으로 호칭하는 방법을 어떻게 알았는지 의심을 품은 내 표정을 보며 즐거워했다. 여섯 살 남자 아이에게 ‘아줌마’라는 단어는 이미 멸칭이었던 것이다.

기혼으로 여겨지는 청년층 이상 노년층 이하 여성을 부르는 호칭이 멸시와 혐오의 의미를 담게 된 것은 오래된 일이다. 사전에도 아줌마는 ‘아주머니’를 낮추어 이르는 말로 정의돼 있다. 단어가 의미하는 나잇대에 포함이 되든 그렇지 않든, 단어 사용법이 어떠한지, 어떤 식으로 여성을 낮잡아 버리는지 이 사회 구성원들은 모두 잘 알고 있다. 심지어 유치원생 아이마저 알 정도이니 말할 것도 없다.

그에 대응하는 ‘아저씨’라는 단어는 어떤가? 처음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가 방송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8년 전에 개봉한 영화 ‘아저씨’가 떠올랐다. 당시 30대 초반이던 남자 배우는 아저씨 호칭과 썩 어울려 보이지 않았으나, 그도 아저씨 자신도 아저씨인 덕에 위로와 용기를 얻은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심지어 이번 아저씨는 나이마저 40대 중반이니 부족할 것도 없다. 부족하기는커녕 이미 수많은 미디어가 이미 아저씨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기 위해 이들이 가진 특징을 감싸주고 있지 않은가. 처음에는 분명한 비하의 의미가 담겨있던 ‘아재’라는 단어가 이후 무려 ‘파탈’이라는 매혹을 의미하는 접미어가 붙어 신조어를 만들 만큼 긍정적 의미의 단어로 격상되는 과정을 나는 분명히 지켜보았다. 아재들의 감성이라는 것이 어떻게 대중문화의 중심에 섰고 유행하게 되었는지, 그 모든 것들이 어떤 방식으로 중년 이상 남성들에게 필요 이상의 용기를 심어줬는지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아저씨라는 단어에 온갖 의미를 부여하다 못해, 청년들이 가진 유일한 젊음마저 가져가겠다는 기세로 ‘영포티’라는 단어마저 만들어내지 않았던가.

모든 미디어가 합심해 아저씨들을 애틋하게 보듬어 감싸주는 일이 마치 지상과제인 듯 호들갑을 떠는 동안, 아줌마는 물론 미혼의 여성을 지칭하는 아가씨라는 단어마저 일상에서의 사용이 어려울 정도로 오염돼버렸다. 이건 한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벌써 20년도 더 전인 IMF 시절에도 어깨가 처진 우리네 아버지만 불쌍해서 어쩔 줄 모르던 사회, 여성의 가치를 나이와 상관없이 깎아 내리면서도 남성들의 기는 살려주지 못해 안달인 사회에서 오래 묵어있던 문제가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상황이니 1년 전 국책연구기관의 한 보고서에서 저출산 원인을 여성들의 ‘고스펙’으로 돌리며 대중에게 무해한 음모 수준으로 가임 여성들의 눈 낮춘 혼인을 장려하자는 내용을 담아 물의를 일으켰던 일이, 가임기 여성 인구를 순위로 매겨 지도에 표시했던 출산 지도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남자들만 측은하고 그들이 처한 상황만 안타까운가. 나는 동년배 남자 사채업자에게 맞으면서도 “너 나 좋아하냐?”라고 물을 수밖에 없는, 남자들의 폭력적 행동을 사랑의 삐뚤어진 표현이라고 배우며 자라온 나의 아가씨들이 더 안타깝다. 결혼을 해도 안 해도, 아이를 낳아도 낳지 않아도 욕을 먹는 나의 구들이, 운전대만 잡아도 김여사가 되는 나의 아줌마들이 더 측은하다. 내가 나의 편으로 삼고 손잡고 펑펑 울어주고 싶은 이들은 그 어떤 아저씨도 아닌 이 모든 나의 여자들이다.

윤이나 프리랜서 마감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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