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펼치니 전시장에 들어선 것 같다. 아담하고 정갈한 전시회다. 언뜻 보아도 하나같이 아름다운 그림 속엔 아이가 있고 어른이 있고 여자가 있고 남자가 있다. 집과 거리와 공터, 들판과 바닷가, 놀이공원이 있다. 낯설 것 없는 사람들, 익숙한 일상 풍경이다. 비가 내리고 눈이 내리고 나뭇잎이 바람에 날리고 햇살이 비친다. 하나의 주제로 묶였으되 독립된 작품들, 그 옆 두어 줄 문장이 그림 제목인 셈이다.
그림을 찬찬히 본다. 사내아이가 비뚜름하게 서서 발 밑을 내려다보고 있다. 갈색 모래밭에 파란 파도가 밀려와 하얗게 부서졌다. 한 걸음만 내딛으면 찰랑대는 물결이 벗은 발목을 간질일 텐데, 신발을 벗어 들고도 아이는 꼼짝할 기색이 없다. “어느 여름 날, 아주 작은 것이 남자아이의 발 아래로 지나가요.” ‘아주 작은 것’이 지나간다.
다음은 거리 풍경이다. 매미채를 든 아이가 달린다. “한 여자아이가 매미채로 아주 작은 것을 잡으려고 해요.” 빈틈없이 늘어선 건물들, 잎을 모두 떨어낸 가로수, 어둑한 하늘에 피어 오르는 연기. 메마른 도시에서 여름도 낮도 아닌 시간에 아이가 잡으려 애쓰는 건 무얼까.
아주 작은 것
베아트리체 알레마냐 글∙그림, 길미향 옮김
현북스 발행∙34쪽∙1만2,000원
뒷짐을 지고 발치에 악어를 두고 어딘가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할머니, 엄마 품에 안긴 아기, 침대 위에 길게 누워 눈물짓는 남자, 스케이트를 타는 아이들, 풍선 다발과 선물보따리를 들고 어색한 눈길을 주고받는 아빠와 아이… 과감한 구도와 세련된 색감, 간결한 듯 섬세한 묘사가 빼어나게 아름다운 그림은 들여다볼수록 아득하다. 수수께끼 같은 글과 더불어 우리를 둘러싼 공기에 미세한 균열을 일으킨다. 어쩐지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
저마다의 삶 속에 ‘아주 작은 것’이 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함박눈과 함께 문득 찾아오며, 평생을 기다려도 끝끝내 만나지 못한 것. 보이지도 않고 잡을 수도 없으나 틀림없이 우리 눈앞에 있는 그것 때문에 누군가는 웃음 짓고 누군가는 겁을 내고 누군가는 상실감에 눈물짓는다.
이 책은 우리에게 허겁지겁 내딛던 걸음을 멈추라고 말하는 것 같다. 지나온 길을 곰곰이 되짚어보라고, 삶의 갈피갈피에서 맛본 수많은 만남과 이별과 크고 작은 선택, 기쁨과 슬픔, 좌절과 성취를 기억하라고, 지금 이 순간을 꼭 잡으라고 말이다.
봄바람에 실린 꽃잎처럼 사뿐히 내려앉았다 이내 날아가는, 남은 향기로 자신의 부재를 알리는, 아주 작은 이것을 무엇이라 부르면 좋을까.
최정선 어린이책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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