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4ㆍ3 70주년이다. 지난 2000년 제정된 '제주 4ㆍ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의하면 제주4ㆍ3의 시작은 1947년 3월 1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날 5만명 이상이 모인 3ㆍ1절 28주년 기념대회에서 제주도민들은 통일조국을 외쳤다. 단순하게 제주도의 문제가 아닌 우리나라의 역사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그 결과는 혹독했다. 3만명에 이르는 희생자가 발생했고, 40여년 동안 입에 올리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유족들은 ‘연좌제’라는 이름으로 또다시 불이익을 당해야만 했다. 다행히 19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사회 곳곳에서 진상규명 운동을 벌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아직 완전한 해결에 이른 것은 아니다. 피해자 배상ㆍ보상 등의 내용을 담은 특별법 개정안이 국회에 계류돼 있고, 명칭을 바로 하는(正名) 문제를 비롯해 미군정의 책임 규명 및 미국의 사과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다. 4ㆍ3의 전국화와 세계화, 4ㆍ3정신의 미래세대 계승 또한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다.
한편 70주년을 맞아 4ㆍ3의 의미를 되새기는 다양한 행사가 전국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먼저 제주에서는 4ㆍ3민중항쟁 정신계승 전국노동자대회 및 범국민대회(3.31)를 비롯해 25회 문화예술축전(3.31∼4.1), 청소년 문화예술한마당(4.3), 해원상생굿(4.9∼15), 전국문학인대회(4.27∼29) 등이 이어진다. 서울에서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4ㆍ3아카이브 전시(3.30∼6.10), 광화문광장에서 국민문화제(4.7)가 열린다.
이처럼 많은 행사가 열리는 것은 4ㆍ3 70주년이 갖는 의미가 각별하기 때문이다. 4ㆍ3을 직접 겪은 유족들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이번 70주년이 마지막 10주기일 수도 있다. 1세대 유족의 경우 이미 70세를 넘기고 있다. 더 늦기 전에 4ㆍ3의 완전한 해결이 시급하다고 보는 이유다.
4ㆍ3의 참상을 직접 보고 기억하는 유족들은 더 심각하다. 당시 열살 소년은 이미 80세 노인이다. 최근 ‘제주4ㆍ3생존희생자 후유장애인 협회’에서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생존희생자(후유장애 생존자와 수형 생존자)의 평균 나이가 87세였다. 더욱이 이들 중 80%가 심각한 통증과 함께 경제적 어려움까지 겪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상황이다.
과거 20여년 제주에서 열린 4ㆍ3위령제를 되돌아보면 매년 꼬박꼬박 참여하던 유족이 어느 해부터 보이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 필자의 집안에서도 ‘행방불명인 위령제’에 꼬박꼬박 참석하던 고모님과 큰어머님이 최근 몇 년 사이에 세상을 달리했다. 해마다 일본에서 찾아오던 유족들이 운명했다는 소식도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더 늦기 전에 생존 희생자와 유족들에게 국제법의 기준에 부합하는 4ㆍ3의 완전한 해결 모습을 보여줘야만 한다.
이들의 염원이 무엇인지는 지난 20여년 간 이어진 합동위령제에 참석한 유족들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다. 1990년대의 경우 유족들은 위령제 참석 자체를 꺼렸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암울한 표정을 짓기까지 했다. 적어도 2000년 4ㆍ3특별법이 제정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특별법이 통과된 이후 2003년 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되고 노무현 대통령이 유족과 제주도민에게 사과한 이후 유족들의 표정은 한결 밝아진다. 2006년 4ㆍ3위령제에 참석한 노무현 대통령이 무력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국가권력을 불법하게 행사했던 잘못에 대해 다시 한 번 사과하자 당시 유족회장은 “대통령님 고맙습니다”라며 눈시울을 붉히기까지 했다.
유족들이 한 분이라도 더 살아계실 때 이들의 한을 풀어주어야 한다. 4ㆍ3의 완전한 해결은 평화와 인권이라는 인류보편의 가치와도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입장에 동의한다면 올해 진행되는 4ㆍ3추념식을 비롯한 관련 행사에 함께 참여해 힘을 실어주실 것을 부탁 드린다.
강정효 ㈔제주민예총 이사장 hallasan195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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