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장례를 치러 아픔의 눈물이 더욱 새롭습니다. 상주인 저는 질긴 목숨을 구차하게 부지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소설 ‘임꺽정’의 작가 벽초 홍명희(1888∼1968)가 경술국치 때 자결한 아버지 상을 치른 후 지인에게 쓴 자필 편지 내용이다.
충북 괴산군은 지난달 경북 안동에서 발견된 벽초의 자필 편지 4통을 복제해 괴산 수산테마파크에 전시할 계획이라고 21일 밝혔다.
수산테마파크는 벽초 생가(홍범식 고가) 인근에 조성되고 있는 수산식품 거점 산업단지이다. 홍범식 고가는 충북도 민속문화재 제14호로 지정돼있다.
벽초 편지 4통은 지난 2월 안동시 풍산면 오미리 풍산김씨 집안이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한 것이다. 원본은 한국국학진흥원이 보관하고 있다.
이 편지들은 홍명희가 22세 때인 1910년 8~11월 충남 금산에서 안동 풍산에 거주하던 김지섭(1884~1928)에게 보냈다.
김지섭은 일제 강점기 의열단원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다. 1924년 1월 일본 황궁에 폭탄을 투척한 뒤 일본 지바 구치소에서 옥사했다.
경술국치 당시 금산군수였던 벽초의 아버지 홍범식은 나라를 잃은 데 분개해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홍범식은 자결 직전 당시 금산재판소 통역 겸 서기였던 김지섭에게 유서를 담은 상자를 주었고, 김지섭이 이 유서를 벽초에게 전했다.
편지에는 아버지 상을 치를 때 도움을 준 풍산김씨 집안에 고마움을 표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나라를 빼앗기고 아버지를 잃은 비통함과 애절함도 배어 있다.
이 편지들은 국내 최초로 발견된 벽초 자필 서한으로, 독립운동가 집안 끼리의 끈끈한 유대 관계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학계에서는 청년 홍명희가 나중에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평등한 세상을 이념으로 담은 소설 ‘임꺽정’을 쓰게 된 배경을 추정해볼 수 있는 귀한 자료로 보고 있다.
괴산군 관계자는 “나라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소중한 자료를 벽초 고향에 전시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며 “필요하면 한국국학진흥원의 도움을 얻어 원본을 특별 전시하는 이벤트도 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괴산에서 태어난 벽초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귀국해 괴산에서 3.1만세 운동을 이끌고 신간회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해방 후 좌익 운동에 몰두하던 그는 1948년 월북해 북한에서 내각 부수상까지 지냈다. 이런 전력 때문에 그의 역사 대하소설 ‘임꺽정’은 1987년 납·월북 작가 해금조치 이전까지 금서로 분류되기도 했다.
충북 민예총, 한국작가회의 충북지회 등은 벽초의 문학 혼을 기리기 위해 1996년부터 청주, 괴산 등지에서 홍명희 문학제를 열고 있다.
한덕동 기자 ddha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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