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 가수 앨리스(30)씨는 5년 전 강원 영월군으로 귀촌을 했다. 간소한 삶을 꿈꾸며 내려간 그는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며 사람들에게 기타와 우쿨렐레를 가르치면서 산다. 문제는 옷이었다.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새로운 것, 특히 다양한 옷을 경험하는 걸 즐기는 사람이었다. 주변에 옷가게 하나 없는 곳에서 앨리스씨가 할 수 있는 건 서울에 갈 때 한꺼번에 옷을 사오거나 원래 있던 옷을 주야장천 입는 것뿐. 그러다 찾아낸 게 옷을 빌려주는 사이트다. “한 달에 1벌씩 4번을 빌리면 6만원 선, 2벌씩 빌리면 10만원 선이에요. 겨울엔 질 좋고 예쁜 코트를 한 달에 4벌씩 갈아입고 다녔어요. 단돈 6만원으로요.”
옷장에 안 입는 옷 평균 57벌?
국내에 돌잔치 옷이나 한복이 아닌 일상용 의류를 빌려주는 업체가 생긴 건 불과 2,3년 전이다. 2015년 ‘원투웨어’가 최초로 시작했고 2016년 SK플래닛이 ‘프로젝트 앤’을 론칭했으며, 비슷한 시기에 ‘더 클로젯’이 문을 열었다. 2017년 비슷한 방식의 ‘윙클로젯’도 생겼으나 1년이 채 안돼 문을 닫았다. 처음 시작한 ‘원투웨어’도 몇 달 전 사라졌다.
업계의 부침은 심한 편이지만 이용자들의 반응은 뜨겁다. 적은 돈으로 여러 벌을, 그것도 고품질의 옷을 집에 앉아서 받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업체는 무료로 옷을 배송해주고 무료로 반납해간다. 세탁도 알아서 해준다. 앨리스씨는 “옷을 소장하고 싶은 욕심만 내려놓으면 된다”고 말한다.
“저렴한 옷은 빌릴 필요가 없기 때문에 대여 사이트의 옷들은 거의 질 좋은 비싼 옷들이에요. 저는 늘 입는 상의, 바지, 치마는 저렴한 걸로 사고, 원피스나 겨울 외투를 주로 빌려 입어요. 이렇게 하면 월 의류지출이 15만원을 넘지 않더라고요.”
옷은 많은데 입을 게 없다고 하소연하는 사람, 한두 번 입으면 질리는 사람, 매번 쇼핑에 실패하는 사람들에게 대여 서비스는 깔끔한 해결책이다. 화장품 마케터 설희아(36)씨는 “50만원이 넘는 실크정장을 열 번도 못 입고 쳐 박아둔” 가슴 아픈 기억을 얘기했다. “비싸게 주고 산 옷이라 버리지도 못하고 계속 옷장만 커지는 거예요. 그러다 유행이 바뀌면 아예 못 입는 옷이 되는 거죠. 옷은 많은데 입을 게 없다는 게 바로 제 얘기였어요.”
그는 결혼식이나 중요한 만남에 입을 옷을 모두 대여 서비스로 대체했다. 한 달에 든 돈은 10만~12만원 선. 특별한 날 “아이라인을 진하게 그리고 특별히 대여한 옷을 입으면 전장에 나가는 장수가 된 기분”이라고 한다. “첫인상이 외모로 결정되는 건 어쩔 수 없잖아요. 사회 생활하는 사람에게 옷은 ‘갑옷’ 같은 개념인데, 옷장에 있는 옷만으로 모든 상황에 대비할 수 없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이죠.”
패션에 관심이 많은 사람만 대여 서비스를 이용하는 건 아니다. 직장인 이지수(28)씨가 옷을 빌려 입기 시작한 이유는 “쇼핑이 너무 귀찮아서”다. “옷에 큰 관심이 없어요. 사러 가는 것도, 집에 쌓이는 것도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데 외부 미팅이 잦은 직업이라 옷차림을 소홀히 할 수는 없거든요. 마침 공유경제란 말이 유행하던 때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대여 서비스를 알게 됐어요.”
그는 일주일에 2번, 한 달에 8벌을 빌려 입는다. 비용은 19만9,000원. 원래 옷을 많이 사지 않았던 터라 지출은 오히려 늘었지만 이씨는 대만족이다. “절약하려고 옷을 빌리는 건 아니에요. 대여를 안 한다고 해서 제가 이런 비싼 옷을 구입할 일은 없거든요. 어찌 보면 새로운 소비를 시작하게 된 거죠. 옷에 관심 없지만 잘 입고 다녀야 하는, 저 같은 사람에게 딱 맞는 서비스라 기꺼이 돈을 지불하는 거예요.” 그는 “어차피 반납할 옷이니 사는 것보다 고민을 덜하게 돼서 좋다”고 덧붙였다.
소유 대신 공유, 젊은 세대의 패션 향유법
대여 서비스는 미니멀 라이프, 1인 가구, 공유경제 등 최근 시대 변화와 맞물리는 거대한 흐름이다. 트렌드 분석가 김용섭씨는 책 ‘라이프 트렌드 2018’에서 대여 문화를 주도하는 Y세대(1985~1999년생)를 두고 “X세대가 경험의 맛을 알아 간 첫 세대라면, Y세대는 소비의 중점을 소유에서 경험으로 바꾼 첫 세대”라고 불렀다.
미래를 위해 기꺼이 현재를 내놨던 부모세대와 달리 이들은 입지도 않는 옷이 방 하나를 차지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현재 앨리스씨가 가진 외투는 계절별로 딱 1벌씩. 이지수씨의 방에도 작은 옷장 하나가 전부다. 그는 최근 이사를 하면서 소장한 옷들 중 5분 1만 남기고 다 버렸다. “특별한 날 산 옷, 추억이 있는 옷, 비싼 옷 등 못 버리고 있던 옷들을 전부 정리했어요. 대여 서비스를 이용한다는 전제 하에요.”
옷을 소유가 아닌 경험의 대상으로 본다는 측면에서 패션 렌털은 ‘패션 스트리밍’이라고도 불린다. 음반을 사서 차곡차곡 쌓는 대신 한 번 듣고 즐기는 걸 선호하는 세대가 현재 패션 렌털의 주 소비자다. 국내 패션 렌털 시장의 유일한 단점은 업체 수가 많지 않다는 것. 가장 활발히 운영되는 ‘프로젝트 앤’과 ‘더 클로젯’의 이용자 수를 가입자 기준으로 합쳐도 많아야 50만명 이하의 시장이다. ‘더 클로젯’의 성주희 대표는 “의류 대여 서비스는 초반에 고가의 옷을 대량으로 구입하고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자본력 없이는 진입이 어렵다”고 한다.
“처음에 많은 돈을 들이고 그 수익을 1,2년에 걸쳐 환원하는 구조라 개인이 시작하기엔 장벽이 높죠. 문을 닫은 업체도 이용자가 없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넘쳐나는 수요에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해요.”
‘더 클로젯’은 가방 30개로 시작한 소규모 업체지만 중간에 이용자들로 하여금 옷을 빌려줄 수 있게 시스템을 바꿔 공급 문제를 해결한 경우다. 그는 “요즘 사람들은 남이 입던 옷을 입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전혀 없다”며 “게다가 한해 버려지는 막대한 패션 쓰레기의 양을 생각할 때 환경보호 차원에서 패션 대여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성 대표의 말처럼 외국에선 패션 렌털이 자라, H&M 등 패스트 패션의 대항마가 될 것인지 여부에 주목하고 있다. 2009년 미국에서 파티복 대여로 출발한 ‘렌트 더 런웨이’는 지난해 매출 1억달러를 돌파했다. 공동 창업자인 젠 하이맨은 노골적으로 자라를 지목해 “비즈니스에서 손 떼게 하겠다”고 도전장을 내민 상태다.
국내에선 최근 코오롱FnC가 다시 렌털 열풍에 불을 지피는 중이다. 남성복 브랜드 ‘시리즈’와 업사이클링(재활용 의류) 브랜드 ‘래코드’는 1월부터 서울 용산구 한남동 매장에서 3일간 유료로 옷을 빌려주고 마음에 들면 할인 가격에 구매할 수 있게 하는 서비스를 시행 중이다. 이 서비스에도 어김없이 ‘착한’이란 말이 붙었다. 기획자인 한경애 코오롱FnC 상무는 “요즘엔 경험에 가치를 둔 합리적인 소비 경향이 두드러진다”며 “충동구매로 입지 않는 옷을 쌓아놓기보다는 먼저 일상에서 경험해 보고 구매 여부를 결정하길 추천한다”고 했다.
우버가 택시 업계를 뒤흔들고 스트리밍 서비스가 음악을 소비하는 풍경을 완전히 뒤바꿔 버린 것처럼, 패션 렌털도 옷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를 바꿔 놓을 수 있을까.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황수정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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