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국에 포섭돼 활동중 러 당국에 체포
첩보원 교환으로 영국 귀환 후 은퇴
자동차 히터에 뿌려진 독극물에 피살
#2
인공 방사능 물질 폴로늄에 살해된
반푸틴 인사 리트비넨코와 흡사
러시아 정부는 “사건과 무관” 주장
#3
반푸틴 정치인ㆍ기업인 테러 배후에
러 정보부 개입 의혹 끊이지 않아
우크라이나 대통령도 독극물 표적
지난 3월4일 오후 1시30분, 영국 남부 솔즈베리 말팅시 쇼핑센터 주차장. 부녀 사이로 보이는 60대 남성과 30대 중반 여성이 ‘HD09 WAO’ 표지판이 붙은 BMW 승용차에서 내렸다. 러시아 이중 간첩 출신의 영국 국적자 세르게이 스크리팔(66)과 전날 러시아에서 도착한 딸 율리아(33)였다. 오랜 정보원 생활이 몸에 익은 듯 주위를 경계하며, 미행자가 없는 걸 확인한 뒤 스크리팔은 딸을 데리고 즐거운 표정으로 인근 식당으로 향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현장을 떠난 때문일까. 위험이 없으리라는 그의 판단은 잘못이었다. 이날 새벽 러시아 비밀요원이 BMW 승용차 환기장치에 제5세대 신경가스를 뿌려 놓은 걸 눈치 채지 못했다. 섭씨 8도 날씨 탓에 쇼핑센터로 오는 도중 켜 놓은 차량 히터에서 뿜어 나온 가스에 서서히 중독된 부녀는 독가스가 효과를 드러낸 2시간 뒤 쇼핑센터 근처 벤치에서 혼수 상태로 발견됐다. 부녀와 이들을 도운 영국 경찰청 닉 베일리 경사도 현재까지 병원 신세를 지고 있고, 식당과 주점에서 스크리팔 부녀와 마주친 130여명 시민들도 독극물 노출 여부를 조사 받고 있다.
영국 광역경찰청 대테러작전 담당 치안감 마크 라울리는 이 사고에 대해, 스크리팔이 “특정 목표물로 설정돼 공격을 당했다”라고 설명했다. 런던의 한 안보 위험 분석 기업 관계자는 “공개적인 테러”라고 말했다.
영국 정부가 배후를 러시아 정부로 지목했으나, 공격자의 구체 신원은 아직까지 분명치 않다. 지난 12일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가 스크리팔 부녀가 ‘노비촉’에 중독됐다는 사실을 공식 발표했을 뿐이다.
1970년대 러시아에서 개발된 ‘노비촉’은 2017년 말레이시아에서 북한 김정남이 살해당할 때 사용됐던 VX보다 위력이 10배는 강력하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화학 무기 감시망을 무력화하려는 목적으로 개발된 만큼 정체를 파악하기조차 힘들다. 러시아에서 추방된 화학자 빌 미르자야노프는 영국 일간지 가디언과 인터뷰에서 “노비촉 계열의 화학물질은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비(非) 국가기관이 사용할 수 없다”라며 러시아 배후설에 힘을 실었다.
‘전직 이중간첩’ 스크리팔, 석방 이후엔 평범한 생활
스크리팔이 영국의 주장대로 러시아의 공격을 받았다면, 그 이유는 스크리팔이 과거 러시아 첩보기관에서 일하다 영국에 포섭돼 이중 간첩으로 활동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소비에트 연방 군인 출신인 스크리팔은 소련군 군사정보기관인 정보총국(GRU)에서 유럽 지역을 담당했다. 소련이 붕괴된 후, 스페인 주재 무관 역할을 맡은 1995년 영국 비밀정보부(MI6)가 그에게 접근했다. 영국 일간지 더타임스에 따르면 그는 ‘포스위드(Forthwith)’라는 새로운 코드네임을 받고 2000년 GRU를 떠난 이후 러시아 외교부에서 일할 때에도 MI6에 러시아 요원 300여명의 개인 정보를 넘기는 등 새로운 조국 영국을 위해 첩보 활동을 했다.
결국 스크리팔은 2004년 러시아 당국에 체포됐다. 법정에서 13년 징역 판결을 받고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6년을 보냈다. 그러나 영국은 그를 잊지 않았다. 2010년 미국과 러시아의 첩보원 교환 과정에서 영국은 스크리팔의 석방을 요청했다. 스크리팔은 당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의 사면을 받고 미국을 거쳐 영국으로 귀환했다. 러시아계 미국 역사학자 유리 펠슈틴스키는 영국 옵저버에 “당시 러시아 정부 내에서 미국이 붙잡은 첩보원 10명을 되찾아 오라는 여론이 비등했고, 이 때문에 러시아가 어쩔 수 없이 미국과 영국의 요청대로 스크리팔을 석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후 스크리팔은 부인 류드밀라와 함께 영국 솔즈베리에 정착했다. 류드밀라는 2012년 암으로 사망했다. 아들 사샤는 2017년 7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갑작스런 간부전으로 사망했는데, 가족들은 사망 원인에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스크리팔과 함께 독극물 공격에 노출된 율리아는 2015년 애인과 동거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이주했다.
가족들이 떠나 홀로 남겨졌지만, 스크리팔은 노동수용소 시절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며 현실을 버텨냈다. 모스크바에 있는 딸과는 ‘스카이프’(영상통화 프로그램)로 통화했다. 때로 부인과 아들이 묻힌 무덤을 방문하거나 지인들과 술자리를 즐겼다. 영국 BBC방송에 따르면 지인들은 스크리팔이 펠메니(러시아식 만두)를 만들어 먹고 컴퓨터로 2차 세계대전 게임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독극물 공격 이유는 ‘경고’”
이젠 일반인이나 마찬가지인 퇴역한 스파이를 러시아가 구태여 공격한 이유는 뭘까. 미 중앙정보국(CIA)의 전직 러시아 작전담당 스티브 홀은 “블라디미르 푸틴 정권이 반대파 혹은 배신자를 향해 ‘너를 꼭 찾아낼 것’이란 메시지를 던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러시아가 “배반자는 안전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영국 영토 내에서 대놓고 스크리팔을 공격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첩보와 무관한 딸 율리아까지 공격한 사실에 주목했다. 펠슈틴스키는 “이건 (암살에 관한) 게임의 법칙을 완전히 바꾼 거고, 많은 사람이 공포에 떨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스크리팔 독극물 공격 사건은 2006년 발생한 러시아 출신 전직 연방보안국(FSB) 요원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사망 당시 43) 살해 사건과 수법이 비슷하다. 영국으로 망명한 후 푸틴 정권을 비판하는 활동을 벌이던 리트비넨코는 그 해 11월 FSB 동료를 만난 후 사망했는데, 그가 마신 것으로 추정되는 찻잔에서 ‘폴로늄’이라는 인공 방사능 물질이 검출됐다. 폴로늄처럼 만들기 힘든 물질을 사용한 것 자체가 애초부터 러시아는 관여 사실을 숨길 의도가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된다.
물론 러시아는 리트비넨코 사건 때도, 지금도 범행의 배후임을 부정한다. 그나마 리트비넨코 사건 때는 그를 방문한 FSB 동료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누가, 어떻게 독극물로 그를 공격했는지 불확실하다. 그저 독극물 성분이 소련에서 개발된 노비촉이라는 점만이 정황 증거로 나온 상태다. 18일 대선으로 네 번째 대통령직에 당선된 푸틴은 “러시아가 영국에서 스파이를 중독시킬 것이라는 주장은 넌센스”라고 일축했다.
수많은 러시아의 암살 피해자들
스크리팔과 리트비넨코 외에도 반(反)푸틴 행보를 보인 러시아인들이 사망한 사건은 종종 의심을 불러 일으켰다. 우크라이나로 도피한 러시아 정치인 데니스 보로넨코프는 2017년 3월 키예프의 한 호텔에서 총에 맞아 숨졌는데, 우크라이나 당국은 이를 “러시아 국가 테러리즘”이라고 주장했다. 러시아 은행업계에서 일하다 러시아 세무 당국의 사기를 고발한 알렉산드르 페레필리치니(사망 당시 44)는 2015년 영국 서리에서 갑자기 사망했는데 그의 배에서 독성이 있는 겔세뮴 흔적이 검출됐다. 푸틴 비판자로 유명한 기업인 보리스 베레조프스키(사망 당시 67)는 2013년 영국 버크셔에 있는 자택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지만, 이미 수 차례 암살 위협을 받은 바 있었다.
푸틴 정부를 둘러싼 의혹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건은 모스크바 한복판에서 테러를 당해 숨진 유력 반정부 정치인 보리스 넴초프의 사망 사건이다. 체첸 공화국의 준군사조직 ‘카디로비치’ 출신인 자우르 다다예프가 넴초프를 암살한 혐의로 붙잡혔다. 그러나 카디로비치를 통솔하는 것은 체첸의 친러시아 성향 지도자로 푸틴 대통령에게도 충성을 맹세한 바 있는 람잔 카디로프다.
러시아 정보부의 공격적인 움직임은 국적도 가리지 않았다. 2004년 반러시아 성향으로 우크라이나 대통령에 오른 빅토르 유셴코도 독극물 공격의 표적이었다. 열렬하게 러시아를 지지했으나, 반 푸틴 운동가로 거듭난 기업가 빌 브라우더는 영국 의회에 출석해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변호사로 러시아 세무당국의 비리를 폭로한 세르게이 마그니츠키가 러시아 감옥에서 비인도적인 대우를 받다가 사망한 걸 계기로 서방 국가들의 일치된 대 러시아 제재를 목표로 하는 ‘마그니츠키법’ 입법 운동을 벌이고 있다.
냉전기 산물 암살, ‘표적살인’이 계승하다
암살은 ‘권한 없는 곳에서 초법적 수단으로 상대를 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범죄다. 하지만 냉전기 미국과 소련, 이스라엘과 이란, 남미와 아시아의 독재정권 등은 거침없이 암살을 자행했다. 소련 KGB는 국외에서 레온 트로츠키를 비롯해 다수의 반 소련 인사를 암살했다. 미국 CIA도 1960년대에 최소 8차례 쿠바의 혁명가 피델 카스트로를 암살하려 했지만 무위로 돌아갔다.
이후 강대국들은 표면상으로는 암살 수법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공표했다. 대표적으로 미 중앙정보국(CIA)은 1976년 제럴드 포드 대통령의 행정명령 이래 공식적으로는 암살 작전을 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러시아처럼 암살에 가까운 행위를 배제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여전하다.
실제로 미국과 이스라엘은 암살이라는 말 대신 ‘표적살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알카에다 혹은 하마스 같은 이슬람 무장단체 지도자를 제거하고 있다. 이들은 표적살인이 전쟁의 연장선상이므로 암살 같은 범죄 행위와는 같지 않다는 논리를 제시한다. 반면 미국시민자유연맹(ACLU) 등은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정당한 기소나 재판 없이 개인을 공격하는 것은 엄연한 국제법 위반”이라고 지적했다.
21세기 들어 이런 종류로 가장 유명한 공격 사건은 2011년 9ㆍ11 테러의 배후이자 알카에다의 수장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한 사건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명령으로 결행한 이 사건은 파키스탄 영토 내에서 진행됐지만 결행은 미국 단독으로 했다. 작전이 종료될 때까지도 파키스탄 정부는 통보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자연히 주권 침해 논란이 일었다. 이 때 시작된 파키스탄과 미국의 균열은 결국 파키스탄이 친중 노선으로 돌아서는 계기가 됐다. 세계의 ‘공적’이었던 오사마 빈 라덴 암살조차 정치 쟁점으로 비화했지만, 관련 기술은 점점 고도화하고 있다. 최근 미국은 드론(공중 무인기)을 적극 활용해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예멘 등지에서 극단주의 무장단체 인사들을 ‘무력화’했다.
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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