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0년 전이다. 1998년 2월 5일, 김기영 감독은 향년 79세로 세상을 떠났다. 1950~70년대 한국영화 산업의 중심부에 있었으나 1980년대에 충무로에서 밀려난 감독은 한 동안 은둔했다. 그를 다시 대중 앞으로 불러온 건 ‘재발굴’의 작업이었고, 회고전을 통해 젊은 관객들과 소통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르네상스를 맞이한 거장은 ‘악녀’라는 프로젝트로 컴백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시점에, 거짓말처럼 그는 화재로 아내와 함께 세상을 떠났다. 평생 동안 모으며 집에 쌓아놓았던 그로테스크한 소품들도 그렇게 잿더미가 되었다.
그의 죽음을 다시 떠올리는 건, 단지 ‘20년’이라는 숫자가 이유는 아니다. 김기영 감독이 펼쳤던 비전은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화두이기 때문이다. 그는 진짜 예술가였다. 스스로는 “돈 되는 영화를 했을 뿐”이라며 깎아 내리지만, 그는 그 누구와도 달랐고, 그 누구도 모방할 수 없었고, 지나칠 정도로 독창적이었다. “나는 변태”라는 자평은 결코 빈말이 아니다. 그는 마치 충무로의 외계인처럼 다른 관점에서 영화를 만들었다. ‘여성’에 대한 수많은 영화들은 그 증거다. ‘하녀’(1960) ‘화녀’(1971) ‘충녀’(1972)로 이어지는 이른바 ‘여자 3부작’에 등장하는 ‘그녀들’은 당대 한국영화의 여성 캐릭터들과 아무 것도 공유하지 않는다.
스크린에 재현되는 여성들이 멜로드라마의 모성애와 청춘 로맨스의 순애보와 호스티스 영화의 운명성에 갇혀 있던 시절, 김기영 감독은 그들에게 봉기의 횃불을 선사했다. 하녀와 식모와 호스티스인 여성은 질서를 교란시키고 결국 한 가정을 붕괴시킨다. 그들은 서구 영화의 팜므 파탈과 다른, 장르의 법칙으로 규정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반면 남자들은 무기력하고 우유부단하고 때론 거세 상태에 처한다. 남한 사회가 전체주의 시스템 속에서 산업화와 근대화로 일사불란하게 치닫던 시기, 김기영 감독은 마치 비웃듯 ‘여성의 위력’에 대한 영화를 만들었으며, 이것은 그의 영원한 테마였다.
김기영의 영화는 단순히 다른 게 아니라, 때론 어떤 한계를 넘어선다. ‘이어도’(1977)는 거대한 충격이다. 심의와 검열이 정점에 달했던 유신시대, 이 영화가 펼치는 풍경은 말 그대로 점입가경이며 경천동지이며 전인미답이다. ‘고려장’(1963)이나 ‘파계’(1974)는 또 어떤가? 제목 자체가 압도하는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1978)는 진정한 ‘컬트’였다. 그에게 삶과 죽음의 경계는 그다지 심각한 장애물이 아니었고, 욕망과 반역의 기운으로 그것을 돌파했다. 예상은 빗나가고, 이미지는 기괴하며, 표현은 거침 없는 영화들의 향연. 바로 김기영의 작품 세계였다.
20주기를 맞아 돌아보는 그의 영화들은 지금을 부끄럽게 만든다. ‘쉬리’(1999) 이후 르네상스를 맞이하며 폭발했던 한국영화는, 이후 언제부터인가 서로가 서로를 베끼기 시작했다. 대중성이라는 미명 하에 차이보다는 반복을 선택하고, 소재주의와 테크놀로지에 의존하며, 물량을 퍼부으며 흥행을 담보하려 한다. 그래서 영화들은 모두 비슷해졌고,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이야기가 전개되며, 창조성보다는 잔재주에 의존한 결과 점점 재미없어지고 있다.
이러한 미학적 고갈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한국영화가 되살려야 할 전통이 있다면 김기영의 반골 기질일 것이다. 관객을 공격하고, 불편하게 만들며, 단 한 순간도 평범해지지 않겠다는 의지. 이것은 단지 영화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의 문화와 예술 상황에 시급한 정신이다. 사족 하나. 김기영의 영화를 제대로 접하고 싶다면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다음 주부터 열리는 회고전을 놓치지 마시길. 장담컨대, 최근 개봉한 그 어떤 한국영화보다 강렬한 체험이 될 것이다.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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