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노무 새끼들이 사람을 죽였다!”
그 해 3월, 무뎌진 바람 끝엔 진득한 피 냄새가 섞여 있었다. 1960년 3월 15일 경상남도 마산, 다섯 번째 대통령은 제 손으로 선택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시민들은 빼앗긴 투표용지 대신 돌멩이를 손에 쥐었다. 불길처럼 번지는 시위 행렬을 향해 소방차가 물대포를 쏘자 시민들은 철길의 자갈까지 그러모았다. 있는 힘껏 던지고 나면 다시 맨손, 진압대를 등지고 허리를 굽혀 돌을 줍던 그들에게 총탄이 날아든 건 그때였다. “이노무 새끼들이 사람을 죽였다고!” 누군가의 절규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얼굴 한가운데 최루탄이 박힌 채 4월의 바다 위로 떠올랐던 열여섯의 소년 김주열은 바로 이 날의 아비규환 속에서 외롭게 죽어갔다. 올해로 58주년을 맞은 ‘3ㆍ15 마산 의거’는 4ㆍ19 혁명의 기폭제가 된 사건이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이끌어낸 4ㆍ19 혁명에 가려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김주열’ 이름 석자로 각인된 그 날의 거리엔 사실 그처럼 돌을 들고 나섰던 만 명의 ‘김주열들’이 있었다. 서슬 퍼런 독재정권의 부정선거에 정면으로 맞섰던 민주당원들, 대의에 몸을 맡긴 교복 바람의 학생들이 바로 그 주역이었다. 그 해 3월, 잔인했던 마산의 봄은 어떻게 4월 혁명의 전조가 됐을까.
투표도 안 한 투표함이 가득 차다니…
“아직 투표도 안 한 투표함 하나를 자빠뜨렸는데, 시상에 거 안에서 표가 억수로 쏟아졌다 안 캅니까. 왜 민주당에 ‘정머시기’라고 젊은 도의원 있잖아예. 투표소 앞에서 길길이 뛰다가 잡혔다캅니더. “
3월 15일 새벽, 경남 마산시 장군동 투표소 앞은 한쪽 어깨에 자유당 완장을 두른 채 조를 지어 순번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3명 혹은 5명이 한 조를 이룬 완장 부대는 사방이 뻥 뚫린 투표소 안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곁눈질로 서로를 감시할 필요조차 없었다. 모두가 ‘매수된 사람들’이었다. 민주당의 경남도의원 정남규가 투표소에 등장하자 긴급 지침이 내려왔다. “부정선거 사실을 민주당원에게 들켜서 되겠느냐.” 긴급 출동한 경찰이 엄한 사람을 잡아가는 사이 투표소에 몰래 숨어든 정씨의 부인 안맹선이 목격한 광경은 가관이었다. 자유당 참관인들이 허둥지둥 긴 막대를 꺼내 투표함 속을 꾹꾹 눌러 담았다. 함 속에 이미 자유당 후보 이승만, 이기붕이 찍힌 투표용지가 가득했던 탓이었다. 투표가 시작된 지 두어 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각이었다.
“협잡 선거 물리치고 공명선거 다시 하자!” 투표소에 입장하지 못한 민주당원과 참관인들이 마산시 당부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오전 10시. 투표 번호표를 받지 못한 유권자들도 아우성을 치며 몰려들었다. 선거 무효를 선언한 민주당 간부들이 맨몸으로 거리에 나서자 이내 길을 지나던 시민들과 학생들이 뒤따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너 댓 명이 수 십 명으로, 다시 수 십 명은 수 백 명으로 불어났다. 작은 바닷가 도시 전체가 혁명의 기운으로 달뜨기 시작했다. 앞장서 걷던 정남규, 정경도, 정진철, 강경술, 황칠규 등 5명의 민주당 간부가 경찰의 총부리에 맞고 쓰러져 개처럼 끌려가자 시민들은 다짐했다. “개표가 열리는 마산시청 앞에서 해가 지면 다시 만나자.”
“며칠 밤낮을 취조실에 쳐 박아 두고 복날에 개 잡듯이 때렸어요. 빨갱이라고 자백하라면서 입에 자갈을 물리고 때리는데, 하루는 내가 정신을 잃자 죽은 줄 알았나 봐. 저들끼리 그러더라고요. “어디에 갖다 버리면 좋겠노?”라고.” (정경도 민주당원 증언)
정경도 당원이 그곳에서 영영 정신을 잃었다면 김주열의 시신이 버려진 마산 앞바다에 함께 던져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취조실을 나올 때면 두들겨 맞은 전신이 풍선처럼 부어올라 피범벅이 된 내복을 제 힘으로 벗어낼 수 없었다. 칼로 옷을 도려낼 때마다 죽음의 예감이 엄습했다. 형무소 밖에서는 ‘모두가 빨갱이로 몰려 몰살당할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매일같이 돌았다. 끼니를 제 때 주지 않아 시간 감각이 무뎌졌다. ‘반쯤은 죽어버린 상태’로 한 달하고도 보름이 더 지났다. 3월 15일에 시작된 감옥에서의 ‘생지옥’은 4월 26일 이승만이 하야 성명을 발표하면서 비로소 끝이 났다.
옥살이는 50일 남짓이었지만, 고문의 상처는 평생을 갔다. 당시 이미 마흔을 넘긴 중년이었던 정진철 당원은 석방 이후 병원을 전전했지만 끝내 고문의 흔적을 지우지 못한 채 세상을 등졌다. “아버지는 1977년 예순의 나이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이십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셨어요. 끝내 그로 인해 돌아가셨습니다.”(정진철 장남 용수씨 증언) 당시 시위를 주도했던 정남규 도의원은 5ㆍ16 군사 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의 보복을 당하기도 한다. “하루는 박정희 정권 사람이 찾아와 아버지에게 5ㆍ16을 찬양하는 성명서를 발표해 달라고 했어요. ‘5ㆍ16이 4ㆍ19 혁명 정신을 계승했다’고요. 일주일을 찾아와 애걸하는데도 들어주지 않자 다음 해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3ㆍ15의거기념제전비 유용’이라는 말도 안 되는 죄목을 뒤집어 씌워 연행해 갔죠.”(정남규 장남 현팔씨 증언) 정남규의 정치 인생은 거기서 끝났다. 그는 1994년 사망할 때까지 국가유공자 대상에도 들지 못했다.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2005년에서야 4ㆍ19 혁명 공로자로 인정됐지만, 이미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이 흘러버린 후였다.
김주열의 이름에 가려진 8명의 소년들
“우리 집엔 선거권이 다섯인데 스물 세 살 난 딸 애 것만 딱 한 장이 나왔어요. 아들놈이 흥분할 때만 해도 크게 개의치 않았어요. 데모는 하지 않겠노라고 담임선생님과 약속을 했었다니까. 그 날 저녁 ‘어머니 잠시 구경만 하고 올낍니더’ 하고 나선 아들이 10시가 돼서도 들어오지 않자, 그제야 육감이 이상했습니다.” (희생자 김용실의 어머니 이명선 여사 증언)
‘개표가 열리는 마산 시청 앞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남기고 집으로 돌아왔던 저녁, 마산고 1학년 김용실은 현관에 앉아 신발끈을 쉴 새 없이 만지작거렸다. 끈을 한번 조이고 시계를 한 번 보고를 반복했다. 오후 7시가 넘어갈 무렵, 그는 해거름을 등지고 현관문을 나섰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야구를 좋아했던 소년은 그 날 시위대의 맨 앞에서 야구공 대신 돌멩이를 들었다.
“용실이 아래 남동생도 함께 시위에 나갔다가 시청 앞에서 형을 만났대요. “형님 언제 나왔노?” 하니까 “지금 사담할 시간 없다”며 앞으로 달려 나가 더래요. 총탄이 날아오는데 앞으로 나간 형은 다시 보이질 않고… 어쩔 수 없이 자기는 산으로 도망을 쳤다고…” (김용실의 누나 김옥주씨 증언)
또래에 비해 키가 훌쩍 컸던 용실의 뒤통수가 어지러운 인파 속에서 빼꼼히 솟았다 서서히 멀어졌다. 그렇게 시위대 앞을 향해 뛰쳐나가던 모습이 가족의 마지막 기억이 됐다. 다음 날, 어머니 이명선씨는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찾아 마산 시내를 정신없이 휘젓고 다니다 경찰에 붙잡혔다. “무조건 빨갱이들이 시켜서 한 짓이라고 자백해라.” 경찰들은 이씨를 사정없이 때리며 윽박질렀다. 그렇게 맞으면서도 어머니는 ‘아들이 어딘가 살아만 있다면 소원이 없겠노라’고 빌고 또 빌었다. 그러나 아들은 머리 한가운데에 총탄이 박힌 채로 발견됐다. 병원을 막아 선 경찰들은 시체마저 내어주지 않았다. “장례를 지내면 용실이 친구들이 따라 나와 데모를 할까 봐 그랬다는 거예요.” 그도 모자라 경찰들은 그의 주머니에 몰래 불온 삐라를 넣어 ‘빨갱이’로 조작을 시도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한 밤 중에 몰래 시체를 인도받아 허둥지둥 화장을 했다. 그렇게 소년이 살다 간 흔적은 봉분도 비석도 없이 가묘로만 남았다.
같은 날 함께 세상을 등진 또 다른 소년에겐 제 시신을 고이 수습해 줄 가족마저 없었다. 경찰이 쏜 총탄에 가슴을 맞고 그 자리에서 숨진 오성원의 나이는 열아홉. 또래가 교복에 가방 메고 학교로 향하는 시간, 그는 시내의 다방을 전전하며 월급쟁이들의 구두를 닦았다. 함께 마산 거리 곳곳을 누빈 동료 구두닦이 두 명이 울면서 시신을 거뒀다. 친구를 팔용산 골짜기에 묻은 그들은 작은 비석을 세웠다.
‘길 가는 나그네여, 여기 민주주의를 찾으려다 3월 15일 밤 무참히도 떨어진 21년의 꽃봉오리가 누워 있음을 전해다오.’
김주열(당시 16세), 김용실(17세), 오성원(19세)을 포함한 9명의 희생자들은 모두 까까머리의 10대 소년들이었다. 김영호(18세), 김영준(19세), 전의규(17세), 김효덕(18세), 김삼웅(19세), 강융기(19세). 누군가의 꿈은 세계적인 경제학자가 되는 것이었고, 또 누군가의 꿈은 소박하게 고향 땅에서 기술자로 사는 것이었다. 누군가는 죽는 순간까지 애타게 어머니의 이름을 불렀고, 또 누군가는 “내 할 짓 하고 죽는 것이니 걱정은 말라”며 어머니를 위로하고 숨을 거뒀다. 마산의 잔인한 봄엔 꽃이 피기도 전에 청춘이 지고 있었다.
민주주의 투쟁사의 시작은 3ㆍ15 의거
3월 15일 밤 홀연히 사라졌던 김주열의 시신은 처참한 모습으로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고, 꺾였던 투쟁을 다시 일으켰다. 전국의 시민들이 궐기했고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이승만의 독재정권은 무너졌다. 참여인원만 10만 명 이상, 사망 185명, 부상 1,500여 명. 역사의 그날, 4ㆍ19 혁명이다.
많은 이들이 1960년 4월 19일을 현대 민주주의 투쟁사의 시작점으로 알고 있는 것은 아마도 그 희생의 크기 차이 때문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파괴는 균열에서 시작된다. 제1공화국의 장벽에 처음으로 균열을 냈던 것은 다름아닌 ‘3월의 마산’이었다. 주권자를 기만한 부정선거를 향해 던진 ‘그 수 만개의 돌덩이’가 없었다면 이 땅의 민주주의는 더딘 걸음을 했으리라.
매서웠던 지난 겨울이 거짓말처럼, 느닷없이 봄이다. 피지도 못한 청춘들을 떠올리니, 또 아픈 봄이다.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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