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폴먼 유니레버 CEO
도브ㆍ립톤 등 소비재 기업
물 절감ㆍ위생환경 개선…
인류 지속가능 생활계획 실천
“매출 2배ㆍ오염물질 절반” 목표
친환경 원재료 100% 사용
“빈곤ㆍ기후변화 해결하면
최소 12조달러 사업 기회”
‘세계 손씻기 날’ 캠페인도
“기업이 주주들을 최우선시하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우리 회사가 전 세계 시민들의 삶을 향상하고 지속가능한 해법을 찾아내는 데 초점을 맞추면 우리는 소비자, 사회와 함께 성장할 것이고 결국 주주들에게도 이익이 돌아갈 것이다.”
좌파 정치인의 연설 같은 급진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 기업인이 있다. 도브, 럭스, 바셀린(이상 보디케어), 립톤(차), 크노르(즉석식품), 매그넘(아이스크림), 퍼실(세재), 선실크(헤어케어) 등의 브랜드로 유명한 영국-네덜란드계 다국적 소비재 기업인 유니레버의 폴 폴먼 최고경영자(CEO)다. 유엔 홍보대사나 기업가 출신의 자선단체 대표, 재벌가의 이단아가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엄연히 기업 이사회와 주주들이 임명한 전문 경영인이다. 그런데도 수시로 “기업의 생존은 환경 재앙을 막는 데 달려있다” “기아에 허덕이는 인구가 10억명이나 되는데 비만 인구가 10억명에 이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사업과 무관해 보이는 이야기를 반복한다.
흥미로운 건 폴먼의 이 같은 발언이 기업 이미지를 위한 입바른 소리나 형식적인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 활동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업 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유니레버 경영을 맡은 지 1년 만에 그는 ▦온실가스ㆍ폐기물 배출 감소 ▦물 소비 절감 ▦지속 가능한 농업 지원 ▦낙후 지역의 위생환경 개선 등을 목표로 한 ‘유니레버 지속가능 생활계획(USLP)’을 발표한 뒤 이행 상황을 매년 리포트 형식으로 공개하고 있다. 유니레버는 이 같은 노력을 인정 받아 지난해 영국 리즈대 비즈니스 스쿨이 조사, 발표한 ‘영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 1위에 올랐고, 폴 폴먼 CEO는 지난해 미국 경제지 포천이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리더 50명’ 가운데 기업인으로는 알리바바의 마윈(2위), 아마존의 제프 베저스(6위), 에어비앤비의 브라이언 체스키(18위)에 이어 네 번째로 높은 20위에 올랐다. 창업자가 아닌 전문경영인으로선 가장 높은 순위다.
유니레버 CEO에 오른 첫 외부 인사
폴먼은 2009년 유니레버 CEO에 선임됐다. 외부 인사로 CEO 자리에 오른 건 그가 처음이었다. 1956년 네덜란드 동부 엔스헤데에서 태어나 네덜란드 그로닝헨대와 미국 신시내티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그는 1979년부터 프록터앤드갬블(P&G)에서 27년간 근무하며 영국 지사 대표, 유럽 지역 회장 등을 역임한 뒤 2006년 스위스 식품기업 네슬레로 옮겨 3년간 최고재무책임자(CFO) 겸 미국 지역 부사장직을 맡았다.
유니레버에서 30여 년간 몸담으며 다양한 경험을 쌓은 뒤에야 그룹 수장이 됐던 이전 CEO들에 비하면, 폴먼 선임은 파격적이라 할 만했다. 내부 인사들을 제쳐두고 그를 선택했다는 건 그만큼 내부에서 위기감이 컸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당시 유니레버 그룹은 2001년 매출액 500억 유로를 돌파한 이후 하락세를 보이며 400억유로 선을 오르락내리락했고 영업이익도 50억유로대에서 정체 현상을 보였다. 그룹 안팎에서 ‘회사 경영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 오르내렸다.
시작부터 남달랐다. 유니레버 최고경영자의 자리에 오른 뒤 그는 “기업은 성장시키되 환경오염 물질 배출은 최소화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유니레버 지속가능 생활계획을 실천해 사회적 영향력을 강화하겠다는 계획도 내놓았다. 이를 위해 기업 내 CSR 담당 부서를 해체했다. CSR을 사업과 분리해 일부 직원들이 전담할 게 아니라 16만 전 임직원이 참여해야 한다고 여겨서다. 폴먼은 단편적인 사회공헌 프로젝트가 아닌 구조적인 변화를 시도했다. 공장의 탄소 배출량을 줄이고 제품 용기 제조에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는 등의 노력뿐만 아니라 사회적 활동과 사업을 결합한 프로젝트를 벌이기도 했다.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세계 손 씻기 날’ 캠페인을 벌이며 위생 관련 교육과 마케팅 활동을 함께 펼치는 식이다. 이 같은 지역에선 마진을 최소화한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을 늘리며 시장을 확대해나갔다.
“주주들의 노예가 되지 않겠다”
폴먼은 취임 직후 “나는 단지 주주들만을 위해 일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장기적 안목으로 가치창출을 하려는 유니레버의 미래를 믿지 않는다면 다른 곳에 투자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곧이어 유니레버 지속가능 생활계획을 발표했다. 유니레버의 매출을 2배로 늘리면서도 환경 오염물질은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설정했다. 원재료는 100% 친환경적이고 윤리적인 것만 사용하고, 10억명 이상의 삶과 건강을 개선하겠다고도 했다.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라는 걸 몰라서 세운 게 아니다. 그는 “이루지 못할 것이란 걸 알지만 그보다 직원들의 의식이 바뀌길 바랐다”고 고백했다.
폴먼의 철학은 사실 유니레버의 기업 정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유니레버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 재임 시기, 위생환경을 개선하고 여성의 가사 노동을 줄여주는 비누를 개발해 사업을 키웠다. 소비자의 생활을 개선하는 데서 사업 기회를 찾았던 유니레버의 뿌리는 폴먼이 지향하는 것과 일치했다. 폴먼의 경영 방침에 반대하며 이탈하는 주주들도 있었지만 많은 이들이 그를 지지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지난해 그는 한 인터뷰에서 “70% 이상의 주주들이 7년 이상 우리와 함께 가고 있다”며 “지속가능 생활계획이 곧바로 성장과 수익, 비용 감소 등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회사를 성장시키지도 못하면서 ‘지속가능’만 외쳤다면 대다수의 주주도 등을 돌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공격적으로 인수ㆍ합병(M&A)을 시도하며 회사의 규모를 키워갔다. 2010년 미국 생활용품 업체 알베르토 쿨버를 인수했고, 2014년 중국 정수업체 친위안그룹, 2016년 한국 화장품회사 카버코리아를 사들였다. 지난해에는 스타벅스의 차 브랜드 타조, 영국 유기농 허브티 제조업체 ‘푸카 허브’를 인수했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지속가능 생활계획에 부합하는 유기농ㆍ친환경 관련 사업 확대다. 유니레버는 푸카 허브 외에 유기농 식품 기업 ‘서 켄싱턴’과 이탈리아의 고급 유기농 아이스크림 브랜드 ‘그롬’을 인수했고, 친환경 화장품 브랜드 ‘더말로지카’ 등을 인수했다.
빈곤 퇴치해야 기업도 성장한다
폴먼의 야심 찬 도전은 성공적이었다. 유니레버 그룹 전체 매출은 폴먼이 CEO를 맡은 첫해인 2009년 398억유로에서 2012년 513억유로로 30% 가까이 늘렸다. 54억유로였던 영업이익도 70억유로로 뛰었다. 단기간에 큰 폭의 성장을 이뤄내기 어려운 소비재 기업으로선 놀라운 성과였다. 매출 규모를 키우기 위해 M&A에만 열중한 건 아니었다. 수익성이 낮은 마가린 사업부를 매각하는 등 사업 구조 개혁도 지속적으로 이뤄나갔다. 그 결과 2016년 매출은 527억유로로 4년 전보다 3% 늘어나는 데 그쳤지만 영업이익은 78억유로로 2012년 대비 12%가량 늘어났다. 폴먼의 지속가능 경영으로 유니레버의 국제적인 평판이 지속적으로 향상했다는 것 또한 보이지 않는 ‘수익’이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환경보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폴먼이 사회운동가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그는 지극히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접근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소득이 늘어나면 소비도 늘어나 기업도 새로운 사업 기회가 늘지 않겠냐는 생각이다. 그는 ‘기업 및 지속가능 발전위원회(Business & Sustainable Development CommissionㆍBSDC)’의 보고서를 인용하며 “빈곤과 기후변화 문제를 해결하면 최소 12조달러의 사업기회가 생길 것”이라고 말한다. BSCD는 여러 CEO와 비정부기구(NGO)들로 구성된 위원회다. 그래서 폴먼은 유니레버에서 사업 현황을 둘러보는 것과 유엔, NGO, 각종 포럼에서 강연하는 것을 같은 업무의 연장선상으로 본다. 아프리카ㆍ아시아 등 신흥시장 지역의 위생환경 개선 캠페인을 벌이는 것도 현지의 관련 상품 소비를 늘리기 위해서다. 그 결과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남미 등 신흥국 매출 비중은 60%대까지 높아졌다.
지속가능 경영, 폴먼 이후에도 지속가능할까
기업이 아무리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도 수익을 내지 못하면 주주들의 외면을 받기 마련이다. 폴먼의 적극적인 M&A로 매출과 영업이익이 늘긴 했지만 최근 들어선 주춤한 모양새다. 유니레버 주가도 지난해 10월 61달러까지 올랐다가 이달 15일(현지시간) 52달러까지 떨어졌다. 지난해 4월 50달러를 돌파하기 전까지 수년간 30~40달러대에 머물렀던 것에 비하면 여전히 높은 수준이지만, 일부 주주들은 유니레버가 계속 성장할 수 있을지 의심을 품고 있다. 폴먼의 지속가능 경영도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다. 유니레버가 위생환경 개선 캠페인을 벌이며 사업을 확대하고 있는 베트남 현지의 한 공장은 열악한 근무여건과 저임금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유니레버는 이제 조금씩 ‘폴먼 이후’를 준비하고 있다. 우선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에 맞춰 영국과 네덜란드로 나뉜 본사를 네덜란드로 통합할 계획이고, 폴먼을 이을 새 CEO도 물색 중이다. 후임 CEO가 폴먼이 만든 유니레버 지속가능 생활계획을 얼마나 추진력 있게 밀고 나갈지 미지수다. 하지만 그는 지속가능 생활계획이 결국 장기적으로 회사에 도움을 주고 주주들에게도 이익을 돌려줄 것이라 믿는다.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초반 출생한 세대)는 세상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꾸는 일을 하는 회사에 관심이 많은데, 유니레버 지속가능 생활계획이 뛰어난 인재를 모으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유니레버의 사업에 대해선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뛰어난 인재들이 유니레버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것이 가장 큰 걱정거리다. 훌륭한 직원들이 계속 들어온다면 아무리 어려운 환경이 닥쳐도 결국 그들이 해결해낼 것이다.”
고경석 기자 kav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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