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황제의 벽은 높았지만, 정현(22ㆍ랭킹 28위)은 주눅들지 않았다.
정현은 16일(한국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인디언웰스 테니스가든에서 열린 남자프로테니스(ATP)투어 마스터스 1000시리즈인 BNP파리바 오픈 8강전에서 페더러를 만나 0-2(5-7 1-6)로 졌다.
지난 1월 호주오픈 준결승에서 기권 패를 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단 한 세트도 따내지 못 했지만 경기 내용에 있어서는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이날 정현은 호주오픈에서 발바닥 물집 부상으로 인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경기를 포기한 아쉬움을 달래려는 듯 거침없이 코트를 누볐다. 1세트 초반 긴장한 모습을 보이며 자신의 첫 번째 서브게임부터 브레이크 당해 게임스코어 0-3으로 몰릴 때까지만 해도 두 달 전 패배를 다시 보는 듯 했다. 하지만 그대로 주저앉지 않았다. 장기인 스트로크 랠리 싸움에서 페더러를 능가하며 5번째 게임을 브레이크로 되갚았다. ‘신예’와 ‘황제’의 싸움답지 않게 경기는 팽팽하게 흘러갔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노련미를 발휘한 건 역시 백전노장 페더러였다. 그는 5-5 상황에서 내리 2게임을 따내 1세트를 마무리했다.
승부는 2세트 첫 번째 게임에서 결정됐다. 페더러의 서비스로 진행된 이 게임에서 정현은 브레이크 기회를 잡았다. 페더러는 위기에 몰릴 때마다 날카로운 서비스로 에이스를 낚았다. 4차례 듀스 끝에 페더러가 브레이크 위기에서 탈출했다. 정현이 절호의 찬스를 날리자 승부의 추는 급격히 기울었다. 이후 페더러는 더욱 기가 살았고, 정현은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면서 1-6으로 2세트를 내줬다. 상대방의 경기력에 압도된 상황에서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지 못하고 쉽게 집중력을 잃어버리는 예전 모습이 다시 나왔다.
비록 이번에도 황제의 벽에 가로막혔지만 정현은 창창한 앞날을 예고했다. 그는 이번 대회에서 한국 선수로는 최초로 마스터스 1000시리즈 8강에 올랐다. 랭킹 포인트 180점을 획득한 그는 다음주 세계랭킹 23위에 오를 예정이다. 이는 니시코리 게이(29ㆍ일본)를 제친 아시아 최강이다. 아직 3월 중순이지만 시즌 상금도 94만5,741달러를 적립, 10억원을 돌파했다. 호주오픈을 포함해 최근 출전한 5개 대회에서 모두 8강 이상의 성적을 거두고 있다. 높아진 세계랭킹을 바탕으로 시드 배정을 받을 수 있어 앞으로 출전할 대회에서도 높은 성적을 기대할 수 있다. 그는 이번 대회에서도 23번 시드를 받아 1회전을 부전승으로 통과했다. 유진선 스카이스포츠 해설위원은 “16강 이전에는 쉬운 상대를 만날 수 있을 만큼 안정된 시드가 확보됐다”고 말했다.
정현은 다음 번에 만나면 더 나은 모습을 보이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페더러와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좋은 경기해서 일단 기쁘고,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던 경기였다”라며 “다음에 만나면 조금 더 좋은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음 번에 페더러와 경기하게 된다면 좀 더 공격적이고, 리턴에 있어서 좀 더 적극적으로 경기에 임해야 할 것 같다”고 스스로를 평가했다. 다음주 발표될 세계랭킹에서 23위에 올라 아시아 최강자 자리에 오르는 것에 대해선 “아시아 넘버원이 돼서 매우 기쁘다”며 “한국선수로서 더 좋은 모습 보일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박진만 기자 bpbd@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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