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살 때 처음 지은 5언시
‘작은 산이 큰 산 가릴 수 있어’
어려서부터 역법ㆍ산수에 밝아
열다섯에 한 살 위 아내와 혼례
6개월 만에 장인 홍화보 유배 길
다산 ‘빙산 금세 녹아’ 호방한 전송
이듬해 돌아온 장인, 다산 아껴
영조에 하사받은 특별한 활도
아들이 아닌 사위에게 물려줘
다산이 사용한 인장 중에 인문(印文)에 ‘구대옥당(九代玉堂) 오세한림(五世翰林)’ 8자를 새긴 것이 있었다. 9대에 걸쳐 옥당(玉堂), 즉 홍문관 제학에 오르고, 5세를 이어 예문관의 한림을 지낸 집안에 대한 자부를 담은 글귀다. 그의 집안은 기호(畿湖) 남인계 중에서도 시파(時派)에 속했던 당색이었다. 아버지 정재원(丁載遠)은 1762년 과거를 보지 않고 음직(蔭職)으로 참봉 벼슬에 올랐다.
“산수에 능통하겠다”
소년의 예기는 어려서부터 도드라졌다. 네 살 때 ‘천자문’을 배웠고, 여섯 살 때 연천 현감이 된 아버지의 임소(任所)에 따라가서 지냈다. 일곱 살 때 소년은 처음으로 5언시를 지었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운 것은
땅의 멀고 가까움이 달라서라네.
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
작은 산은 큰 산을 가로 막을 수 없지만 원근의 차이가 있고 보면 이것이 가능하다. 작은 산이라고 큰 산만 못할 것이 없고,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큰 산을 가릴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일곱 살짜리 꼬마의 생각이 당차고 기특하다.
시를 본 아버지가 한 마디 했다. “분수(分數)에 밝으니, 크면 역법(曆法)과 산수(算數)에 능통하겠다.” 단 열 글자로 자식의 미래를 꿰뚫어 예견했다. 그 아들은 예견대로 자라서 역법과 산수 분야에 특출한 두각을 드러냈다. 배다리와 유형거(游衡車)를 만들고 거중가(擧重架)를 제작했으며, 수원 화성 역사(役事)를 진두지휘하기까지 했다. 다산의 모든 저작의 바탕에는 수학적 질서와 과학적 사유가 깔려 있었다.
떡잎부터 달랐다
일곱 살 때 천연두를 앓았다. 그나마 가볍게 지나가서 오른쪽 눈썹 중간 두 곳에 흉터를 남겼다. 덕분에 눈썹이 세 도막이 나서 스스로 삼미자(三眉子)라 불렀다. 일곱 살부터 열 살이 되기 전 세 해 동안 지은 글이 꽤 많았다. 이를 묶은 ‘삼미집(三眉集)’이란 책이 있었으나 전하지 않는다. 떡잎부터 예사롭지가 않았다.
열 살 때인 1771년에는 아버지 정재원이 연천 현감 임기를 마치고 경기도 광주 마현의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정재원은 새로 과거를 볼 작정으로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공부했지만, 막상 1774년에 응시한 대과(大科)에서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그 사이에 다산의 형제들은 아버지의 훈도를 받았다. 다산은 경사(經史)를 배우면 배운 글을 본떠 바로 글로 지었다. 문체가 원래의 글과 방불했다. 이렇게 1년 동안 지은 것이 제 키와 맞먹었다. 13세 때는 두보의 시에 맛을 단단히 들였다. 아예 두보 시집을 앞에 놓고 통째로 그 운자를 써서 시를 짓기 시작해, 따라 지은 시가 수 백 수에 달했다. 아버지의 친구들이 놀러 왔다가 그 시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말끝의 가시
장가는 열다섯 나던 1776년 2월 15일에 들었다. 무과에 급제해 병마절도사를 여러 번 거쳐, 문과 출신들만 한다는 승지까지 지낸 홍화보(洪和輔)가 그의 장인이었다. 아내는 그의 외동딸이었고 다산보다 한 살 위였다. 여기에 1938년 최익한이 전한 이야기가 하나 있다. 혼례를 올리던 날, 아홉 살 연상의 사촌 처남 홍인호(洪仁浩)가 보니 새 신랑은 수염 한 올 없는 맨송맨송한 꼬마였다. 그가 이렇게 놀렸다.
“사촌매부는 삼척동자라(四寸妹夫, 三尺童子.).”
매부가 온다 해서 보러 왔더니, 고작 삼척동자 아이가 왔다고 했다. 꼬맹이 새 신랑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자리에서 바로 되받았다.
“중후(重厚)의 장손이 경박한 소년일세(重厚長孫, 輕薄少年.)”
‘사촌(四寸)’과 ‘삼척(三尺)’을 대구 삼아 ‘요런 귀여운 꼬맹이를 봤나’하고 농을 걸었다. 대뜸 ‘중후(重厚)’와 ‘경박(輕薄)’을 맞걸어, 묵직해야 마땅할 장손이 그런 소년 같은 경박한 말을 해서야 되겠느냐고 꾹 눌러버린 것이다.
처남은 어린 매부의 당찬 반격에 그만 기가 질렸다. 소년을 동자라고 놀리자, 그 동자가 청년을 소년으로 끌어내렸다. 더 놀라운 것은 사촌 처남 홍인호 조부의 이름이 홍중후(洪重厚)였다는 점이다. 중후란 표현에 중의(重義)를 담았다. 놀라운 순발력에 지기 싫어하는 성정까지 단박에 드러났다. 요것 봐라! 보통내기가 아니로구나. 되로 주고 말로 받았다. 낄낄 웃고 놀리려다 정색을 한 꾸지람과 만난 셈이었다. 웃고 넘겼지만 뒤끝이 남았다. 홍인호와는 이 일로 급격히 친해졌다. 그러나 훗날 홍인호는 남인 공서파(攻西派)로 돌아 다산을 정면에서 공격하는 자리에 섰다. 처조부의 이름 자를 실제로 이렇게 입에 올릴 수는 없었겠지만, 어린 시절 다산의 예기를 보여 주려는 의도가 담긴 일화다.
금세 녹을 빙산의 위세
장인은 1776년 8월 15일에 평안도 운산(雲山) 땅으로 유배를 갔다. 신혼 6개월 만의 일이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홍국영(洪國榮ㆍ1748~1781)의 심기를 건드렸던 것이다. 그가 유배를 떠날 때, 친지들이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홍국영에게 뇌물을 보내 그의 노여움을 풀라고 하자, 홍화보가 말했다. “그대는 홍국영을 태산으로 보는군. 그는 금세 녹을 빙산에 지나지 않아.” 무인으로서의 기개가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
‘다산시문집’ 앞 쪽에 ‘운산으로 귀양 가는 장인, 절도사 홍화보를 전송하며(送外舅洪節度和輔謫雲山)’란 작품이 실려 있다. 귀양길에서 소년 사위가 장인에게 준 시는 이렇다.
이별 길에 가을빛 돋아나는데
작별하는 정자에선 호방한 노래.
힘겹게 학령(鶴嶺)을 넘어가서는
아득히 용하(龍河)를 건너가시리.
남해에선 밝은 구슬 값도 없더니
서관(西關)엔 백설만 담뿍 쌓이리.
빙산은 가늠할 수 없는 법이라
맘 편히 풍파를 건너옵소서.
別路生秋色, 離亭發浩歌.
靡靡踰鶴嶺, 沓沓出龍河.
南海明珠賤, 西關白雪多.
氷山未可料, 安意度風波.
장인이 유배 길에 오른 것은 하필 추석 당일이었다. 산천엔 스산한 가을빛이 깃들어 가는데, 이별의 자리에서는 뜻밖에 호방한 노래가 울려 퍼진다. 불의 앞에 무릎 꿇지 않는 장인의 기개를 높였다. 홍화보의 직전 벼슬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였다. 5구의 ‘남해의 구슬 값’은 제대로 알아주는 대접을 못 받았다는 뜻이다. 이제 멀리 서관 땅 운산으로 귀양을 가면 흰 눈 속에 덮여 존재마저 잊힐 것이다. 7구의 ‘빙산’은 앞서 홍화보가 친지에게 했다는 말에서 끌어왔다. 지금은 빙산의 위세에 눌려 풍파의 세월을 지내시겠지만, 안의(安意), 즉 마음을 편안히 잡수시고 이 힘든 시간을 건너가시라는 말씀이었다. 빙산은 얼마 못 가 녹게 되어 있다. 15세 소년 사위의 마음속에는 이미 듬직한 어른이 들어 앉아 있었다. 홍화보는 이듬해 11월 26일에 유배지에서 돌아왔다.
자네가 간직하게
어렸지만 듬직했으므로 홍화보는 다산을 몹시 아꼈다. 홍화보의 예견대로 빙산이 녹아 홍국영이 실각하자 그는 다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진주로 부임했다. 1780년 봄, 다산이 아내와 함께 장인을 뵈러 갔다. 장인은 사위를 위해 촉석루에서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다산은 이 자리에서 그 유명한 진주 검무(劍舞)의 현란한 춤사위를 구경하고, ‘칼춤 시를 지어 미인에게 주다(舞劍篇贈美人)’란 7언 32구에 달하는 장시를 지었다. 19세 때였다. 읽어 보면 가락이 살아 있고 묘사가 핍진해서 검무의 춤사위가 그대로 떠오른다. 이미 난숙한 솜씨였다.
홍화보에게는 지난 날 영조가 특별히 하사한 각궁(角弓)이 있었다. 내원(內苑)의 활쏘기에서 홍화보가 열 발을 쏘아 한 발도 못 맞히자, 임금이 그의 활을 달라 하여 보시고는 “네 솜씨보다 활이 문제다. 이렇게 늘어진 활로 어이 맞히리” 하고는 자신의 활에 살을 매겨 과녁에 당기자 표적에 정확하게 맞았다. 그리고는 그 활을 홍화보에게 선물로 하사했다.
홍화보는 이 귀한 가보를 아들이 아닌 사위에게 물려주었다. 뒤에 다산도 규장각에 들어가 내원(內苑)에서 활쏘기 시험이 있을 때마다 번번이 과녁을 벗어나 벌을 받았다. 장인에게서 받은 각궁으로 쏘게 되면서 과녁을 잘 맞혀 상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다산은 ’홍절도사에게 임금이 하사한 각궁기(洪節度御賜角弓記)’란 글에서 그 전후 사정을 자세히 썼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 ‘정민의 다산독본’은 조선후기 실학의 대명사인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잘 알려지지 않은 삶을 매주 금요일 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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