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일본에서 유행한 말 중에 ‘후라리맨’이라는 신조어가 있었다. 일본어 ‘후라후라’와 ‘샐러리맨’을 조합한 말이다. ‘후라후라’는 뚜렷한 목적도 없이 어슬렁거리는 모양을 나타내는 의태어다. 우리말로 옮기면 ‘어슬렁어슬렁’이나 ‘빈둥빈둥’쯤 된다. 어차피 일찍 집에 가봐야 할 일도 없다며 퇴근 후 카페에서 차 한 잔 시켜 놓고 앉아 스마트폰 게임을 하거나 마음 맞는 동료와 한잔 걸치는 등 자기 편한 대로 한두 시간 놀다 귀가하는 남성 회사원을 이르는 말이다.
▦ 이 말은 일본의 사회심리학자이자 다작 에세이스트인 시부야 쇼조 메지로대 명예교수가 2004년에 낸 ‘상사를 알면 재미있다’는 책에서 처음 썼다고 한다. 시부야 교수는 애초 이 말을 집안에서 존재감을 잃고 바깥을 맴돌다 늦게 귀가하는 아버지 세대의 남성을 지칭해 사용했다. 10년 지나 이 말이 회자된 데는 지난해 NHK 기획 방송이 기폭제가 됐다. 일본 정부가 2016년부터 경제부흥과 저출산 대책의 일환으로 노동시간 단축을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이에 호응해 기업들이 너도나도 야근을 줄이자 나타나는 현상의 하나로 ‘후라리맨’을 다룬 것이다.
▦ 퇴근이 빨라지자 집으로 가서 무얼 해야 할지 어리둥절해진 남성 회사원들 중에는 집에는 평소처럼 야근이라고 둘러대고 시간 때우기 하거나 취미생활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가사와 육아 부담을 오롯이 떠안는 여성들은 이 방송을 보고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이 다수였다. 하지만 집안일을 도울 준비가 안 된 상태로 집에 일찍 와 봐야 오히려 짐만 된다는 여론도 없지 않았다.
▦ 주로 가사노동인 비임금 노동(unpaid work)과 관련해 OECD가 집계한 최신 자료인 2014년 통계를 보면 일본은 남성의 가사노동 시간이 하루 41분이다. 통계치가 나와 있는 28개 회원국 중 최하위다. 한국은 4분 더 긴 45분으로 이보다는 낫다. 하지만 이 통계에서 남성의 일일 가사노동 시간이 1시간에 못 미치는 나라는 한국 일본뿐이다. 남성 가사노동 시간 1위인 덴마크(186분)의 4분의 1도 안 된다. 주당 법정 근로시간을 52시간으로 단축하는 내용을 포함한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7월 1일부터 시행된다. 퇴근 시간이 빨라진 한국 남성들이 어디로 갈지 궁금하다.
김범수 논설위원 bs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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