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문화관 창작실에 입주한 첫날, 호젓한 기분에 들떠 책도 읽고 시상도 떠올리며 밤을 꼬박 새웠다. 새벽녘 눈을 조금 붙이고 깨어나 산 쪽으로 난 창문을 열었더니, 아 눈앞에 펼쳐진 신세계. 서설(瑞雪)이었다! 넋을 잃고 아름다운 설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한적한 별서(別墅)에 와 있는 듯싶었다. 눈을 밟고 싶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쌓인 눈 때문에 두어 뼘은 키가 자란 듯싶은 장독대의 항아리들. “느티나무에 실려 있는 앙증스럽고 섬약한 눈꽃들, 포근포근한 눈밭에 폭폭 찍혀 있는 고양이 발자국들.”(박경리, ‘눈꽃’) 나는 선생님이 살아계실 때 돌보시던 고양이와 거위, 나무들, 천연의 냉동저장고, 돌확들, 혼자 머무시던 집필실, 손수 가꾸시던 텃밭 등이 어찌 됐나 궁금해 어슬렁어슬렁 나무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미끄러운 계단을 조심조심 올라가며 손꼽아 세어보니, 선생님 떠나신 지 벌써 10년. 집필실 주위를 둘러보다가 비닐로 가려진 거위집 가까이 다가가 어웅한 비닐막 속을 들여다보는데, 갑자기 꽥꽥∼하는 소리에 흠칫 뒤로 물러섰다. 빈 집인 줄 알고 들여다보다가 거위 때문에 깜짝 놀라긴 하였으나 반가웠다. 박경리 선생님을 뵌 듯이!
한국에서 창작실이란 개념조차 없을 때 최초로 작가와 예술가들을 위해 세워진 토지문화관. 창작하는 일의 광휘와 신산의 고통을 몸소 겪으신 작가가 자비를 털어 세운 창작의 산실. 나는 이 창작 공간이 세워진 초기부터 지금까지 십 수 년을 드나들며 작가들을 위한 선생님의 사랑과 관심, 배려를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선생님은 몸에 해로운 농약과 비료 따위를 일절 사용하지 않고 손수 가꾸신 청정한 채소와 과일로 거의 매일 한두 가지 반찬을 만드셔서 작가들의 식탁에 올리셨다. 아무튼 작가들을 위해 선생님이 안다미로 베푸신 사랑은 참으로 지극했다.
마을 버스정류장의 부스에 붙은 선생님의 시에도 나오지만, 선생님은 창작실에 온 작가들을 친자식처럼 여기셨다. “우습게도 나는 유치원 보모 같은 생각을 하고 모이 물어다 먹이는 어미 새 같은 착각을 한다.”(‘산골 창작실의 예술가들’)와 같은 시에서 선생님은 창작실에 머무는 작가들을 “오묘한 생각을 품은 듯 청결하고, 젊은 매 같이 고독해 보인다”고 하셨는데, 나는 지금도 이 공간에 들어서면 새끼들을 돌보는 어미 새 같은 모성애로 가득한 선생님의 뜨거운 숨결을 느끼곤 한다.
창작실을 운영하시면서 선생님은 늘 작가의 입장에서 작가들이 창작에만 전념할 수 있는 여건과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애쓰셨다. 작가들을 지원하는 직원들에게도 함부로 말도 건네지 말라고 하셨으며, 항상 존경하는 태도로 작가들을 대하라고 하셨다고 한다. 물론 선생님 자신도 당신의 존재가 작가들을 힘들게 할까 저어하여 작가들 앞에 거의 나타나지 않으셨다. 작가들이 창작실에 몇 개월을 머물다 가든 입주의 결과물도 요구하지 않으셨다. 창작품이란 것이 어떤 특별한 공간에 와 있다고 뚝딱 나오는 것이 아님을 선생님 스스로 잘 아셨기 때문이 아닐까.
오후 들어 반짝 해가 나자 흐벅지게 쌓인 눈도 금세 녹았다. 나는 선생님의 숨결을 더 느끼고 싶어 선생님이 머무시던 집필실 뒤편의 자드락 밭으로 올라갔다. 어느 여름날 나는 뒷산으로 올라가다 자드락 밭에 앉아 시골 아낙 같은 모습으로 호미를 들고 풀을 뽑으시던 광경을 본 적이 있다. 농심을 곧 천심으로 여기고 글쓰기와 농사를 병행하셨던 글 농사꾼 선생님, 그래서 평생의 화두가 ‘생명’과 ‘창조’였을까. 만귀잠잠한 밤에 늦도록 불 밝힌 작가들의 방을 보며 그렇게 좋아하셨다던 선생님이 오늘도 지켜보고 계실 것만 같아서 창작실에 입주하면 나는 도무지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다.
고진하 목사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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