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적으로 미투(Me too) 운동이 확산되면서 미국의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말했다는 이른바 ‘펜스 룰’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원래 펜스 룰이 나온 것은 지난 2002년이었다고 한다. 당시 하원의원이었던 펜스는 아내가 아닌 여성과는 단둘이 식사하지 않는다고 했다. 원래 펜스의 발언이 미투 운동과는 상관없이 나왔으나 최근에는 이른바 남성들의 미투 대처법 내지 자기관리법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이 방법의 핵심은 사회생활에서 가족 이외의 여성과 마주칠 가능성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회식에도 여자는 부르지 않고 출장이나 다른 회사 업무에서도 아예 여자는 빼고 일을 처리한다. 여성과의 접촉이 없으니 미투에 연루될 일도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미투 운동이 시작되기 전 한국에서 펜스 룰을 아주 선도적으로 적용한 사례가 있었다. 2013년 5월 박근혜 정부 출범 직후 첫 미국 방문 때 윤창중 청와대 대변인이 주미 한국대사관의 파견 인턴 여직원을 성추행 사건이 일어나자 당시 청와대에서는 대통령 외국 순방 때 여성인턴을 배제한다는 대책을 내놓았다. 실제로 얼마 뒤 정홍원 국무총리가 태국을 방문했을 때 인턴 전원을 남성으로 선발하기도 했었다. 인턴이 모두 남성이니까 ‘여성 인턴’ 성추행 사건이야 아예 발생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방책은 성추행 사건의 근본원인이 “인턴이 여성이었기 때문”이라는 사고방식에서 도출되었다. ‘여성 인턴’ 성추행 사건은 일어나지 않더라도, 사건의 근본 원인인 남성의 문제를 건드리지 않는다면 또 다른 여성은 또 어떤 남성에게 다시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당할 수도 있다. 이런 대책이 나온 이유는 사건의 책임을 다른 곳에 떠넘기려는 생각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의 이런 사고방식은 세월호 사건까지 이어졌다. 세월호 참사발생 34일 뒤 박근혜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문에서 해경을 폐지하겠다고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해경은 대체 뭘 했냐고 말이 많으니까 아예 해경을 해체하면 된다는 논리는 펜스 룰과 많이 닮았다. 세월호 승객구조에 늑장을 부린 해경에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청와대가 그 책임을 떠넘기는 모습은 볼썽사납다. 우리는 아직도 세월호 참사 당일 박근혜 대통령의 잃어버린 일곱 시간의 행적을 알지 못한다.
정권이 바뀌어도 비슷한 현상은 계속된다. 얼마 전에는 비트코인이라는 암호화폐가 투기의 온상이라는 비난여론이 높아지자 정부에서 거래소를 폐쇄하는 계획까지 마련했다. 거래소를 폐지하면 미래의 새로운 가능성마저 함께 지워버릴 수도 있다는 점에서 펜스 룰의 IT 버전이라 할 만하다.
가장 최근의 사례를 들자면 2021학년도 수능출제범위에서 수학과목의 기하와 벡터를 제외한다는 결정이 있었다. 수능출제범위가 이렇게 조정된 이유는 지난 2015개정 교육과정에서 기하가 진로선택과목으로, 벡터는 전문교과과목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교과목 내용을 이렇게 조정한 기본원칙은 학생들의 학습 부담을 최대로 줄이겠다는 것이다. 이 원칙에 반대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문제는 학생 부담을 줄인다는 명목으로 꼭 필요한 단원 자체를 날려버린다는 점이다. 그렇게 단원을 없애더라도 변별력을 높이기 위해 시험문제를 어렵게 출제하면 학생부담은 별로 줄어들지 않는다. 반대로 특정 단원을 유지하더라도 기본개념 중심으로 문제를 쉽게 출제하면 부담은 줄어든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뷔페식당에 가서 다이어트 한답시고 먹는 음식의 가짓수를 제한하는 것이 현명한 결정일까? 그렇게 제한된 메뉴를 과식하면 다이어트는 물 건너간다. 많은 가짓수의 음식을 먹더라도 아주 조금만 먹는다면 다이어트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균형 잡힌 영양섭취를 생각한다면 후자가 바람직하다. 지금까지 교육당국의 선택은 전자에 가까웠다.
펜스 룰의 원작자인 펜스 부통령은 평창 올림픽 개막식에서 북한의 김영남 삼임위원장 및 김여정 제1부부장과 눈길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지금까지 미국의 대북정책은 대체로 북한을 모른 척하거나 아예 없애버리는 방향이었다. 북한을 모른 척 한 오바마 정부 동안 북한 핵은 고도화되었다. 북한을 없애겠다던 부시 정부는 그 이전의 북미 공동코뮤니케를 휴지로 만들어 버렸고, 트럼프의 강공 드라이브는 전례 없이 한반도 전쟁가능성을 높였다. 미국에겐 가장 손쉬운 선택이었을지도 모르나, 그런 식으로는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북한을 무시하고 없애겠다는 발상이 사태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음은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지금 시점에서 너무나 명확해졌다. 미국은 북한과 더불어 사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펜스 룰은 결코 올바른 대처법이 아니라는 비판은 여기저기서 제기되었다. 펜스(Pence) 룰이 여성들에게 일종의 펜스(fence), 즉 울타리로 작용하면서 여성들로부터 공정한 기회를 박탈할 것이기 때문이다. 완전히 여성을 차단하고 산다는 건 또 얼마나 비현실적인가. 국제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북미 정상회담에 나서는 미국이 펜스 룰의 어리석음을 다시 한 번 깨닫기를 간곡히 기대한다.
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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