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 페셰미뇽’ 김희정 대표
좋아하는 일 찾아 퇴사 후
퇴직금 들고 프랑스로 떠나
제과 명문 ‘ENSP’ 졸업
“마카롱만 있는 게 아니니까
고급 디저트로 경험 넓혀 보세요”
‘명문고 명문대 출신의, 잘 나가던 대기업의 알파걸이 어느 날 직장을 박차고 나와 자아를 찾아 프랑스로 떠난다. 퇴직금을 탈탈 털어 시골마을 제과학교에서 공부하고, 프랑스 현지인도 따기 어렵다는 파티시에(제과제빵사), 쇼콜라티에(초콜릿 요리사) 자격증을 딴다. 한국에 돌아와 자기 가게를 차린다.’
이태원 제과제빵 스튜디오 ‘르 페셰미뇽’의 김희정 대표의 ‘인생 스토리’를 듣다 보면 10여년 전 방영된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이 떠오른다. 프랑스 제과명문 ENSP(Ecole Nationale Superiere de la Patisseieㆍ국제고등제과학교)를 졸업한 그는 지난 해 11월 이태원에 스튜디오를 열었다. 제과제빵 수업과 디저트 주문 생산을 함께한다.
9일 스튜디오에서 만난 김 대표는 화이트데이를 앞두고 캐러멜 포장이 한창이었다. 여러 과일과 버터를 섞은 수제 캐러멜을 “아직 국내에서 저평가된 디저트”라고 소개한 그는 “프랑스에서 디저트는 식사 후 꼭 곁들이는 필수 코스인데 아직 한국에서는 특별한 날 ‘힘 줘서’ 사먹는 음식으로 인식된다”고 말했다. 화이트데이에 어울리는 또 다른 디저트로 과일을 시럽에 넣어 굳힌 당과를 추천했다. 물과 설탕, 물엿을 넣어 섭씨 155도까지 끓인 후 꼬치에 낀 방울토마토나 딸기를 넣었다 빼면 쉽게 만들 수 있다. “밸런타인데이나 화이트데이가 너무 상업화된 게 문제지만 그런 날이 있어 주변에 소중한 사람을 챙기게 되잖아요. 고급 디저트를 접하면서 경험의 표면적을 넓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제과업계 최대 대목인 지난해 연말에 스튜디오를 오픈해 대목의 끝 무렵을 보내고 있는 그는 “제과제빵 시장이 (드라마 ‘…김삼순’ 방영할 때보다) ‘레드 오션’이 된 건 사실이지만 아직 제가 차별화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국내에는 전문 쇼콜라티에 교육 프로그램이 적고, 과정도 단순해요. 파티시에 교육은 상대적으로 많지만 국내 제과제빵 기술이 일본을 거쳐 들어오면서 변형된 형태로 교육하는 곳이 많고요.”
김 대표의 전 직장은 SK네트웍스. 이화외고, 연세대를 졸업한 뒤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듯 입사한 대기업이었다. 직장 생활은 안정적이었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김 대표는 “대학도 수능 점수에 맞춰 갔다. 입사 전에는 하고 싶은 일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고, 눈앞의 계획만 착실하게 쫓았다”고 말했다.
10년간 “좋아하지 않은 일을 하면서” 스트레스는 쌓여 갔다. 퇴사 후 “엉뚱한 일을 하게 된” 선배들의 모습을 보니 미래에 대한 불안이 더 커졌다. 김 대표는 “퇴사를 고민하던 시기, 케이크 만들기 특강을 몇 번 들으면서 다음 직업은 파티시에로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회사는 구조조정을 위해 명예퇴직 신청자를 받았고, 과장이었던 김 대표는 퇴직 대상자는 아니었지만 사표를 던졌다. 2014년 10월 제법 큰 돈을 퇴직금으로 쥐고 1년간 프랑스어를 난생 처음 공부했다. 김 대표는 “프랑스에서 영어로 수업하는 학교도 있지만 외국인이 다니는 곳이라 학비도 비쌌고 현지 수준의 교육과 경험을 기대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1년간 공부해 ENSP에 합격했지만, 이번에는 ‘곰손’이 복병으로 떠올랐다. 김 대표는 “프랑스 유학 초반 3일간 요리 수업을 들었는데 ‘한국은 프랑스와 다른 칼을 쓰냐?’고 질문을 받을 정도로 칼질도 서툴렀다”며 웃었다. 매일 밤 자취방에 돌아와 독하게 연습했고, 2년에 걸쳐 파티시에, 쇼콜라티에 자격증을 차례로 따고 지역 일간지에 ‘어릴 적 꿈을 이룬 여성’으로 소개되며 대미를 장식했다.
국내 유명 제과제빵 명장에 비해 경력이 짧지만, 상대적으로 프랑스 본토의 ‘핫한 디저트 트렌드’를 방금 경험했다는 장점을 내세운다. 김 대표는 “한국에서는 마카롱처럼 하나의 디저트가 유행처럼 확산되는데 비해 프랑스는 ‘봄에는 딸기케이크’처럼 계절마다 선보이는 디저트가 있다. 똑같은 제품을 매해 변형해 내놓지만 어떤 제빵사의 제품인지 한눈에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은 미리 주문받은 디저트만 판매하지만, 여유가 생기면 스튜디오에 이어 판매 전문점도 열 계획이다.
안정적인 월급이 그리운 적은 없을까? 김 대표는 “아마 그때 결정하지 못했다면 지금까지 퇴직 이후를 고민하고 있을 것”이라며 “자유롭게 일하는 지금이 좋다”고 말했다.
이윤주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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