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 소송(Class Action)은 특정인(회사)의 위법 행위로 동질적 피해를 입은 다수를 효율적으로 구제하고 경영 투명성 등을 제고하기 위해 마련된 법적 수단으로, 소송 비용에 비해 기대되는 법익이 적은 개인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데 기여해왔다.
미국은 1929년 대공황 직후인 1938년 연방민사소송규칙(Federal Rules of Civil Procedure)에 소송 근거를 두었고, 66년 개정 규칙(제23조)으로 소 제기 요건 및 절차를 간소화하고 판결의 효력 범위를 확대함으로써 소송 법원의 문턱을 대폭 낮췄다. 38년 규칙의 목적이 기업 비리 및 횡포로부터 소액주주들의 재산권을 보호하려는 거였던 반면 66년 개정의 주된 취지는 인권 차별현실의 개선, 즉 64년의 시민권법(Civil Rights Act)의 실효적 의미를 강화하자는 거였다. ‘규칙 23조’에 근거한 집단소송은 학교와 직장, 사회의 인종 종교 성별 출신지에 따른 암묵적 노골적 차별을 개선하는 위력적인 수단이었다.
1960년대는 지금과 또 달라서 회계 부정 주가 조작 불성실 공시(公示) 등 약점 없는 기업이 드물었다. 심지어 매출이 부진해도 수익 전망을 과장해 투자자를 호도했다는 식으로 증권집단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다. 피소된 기업으로선 이미지 추락을 물론이고 소송 과정에 기업의 약점과 경영 전략 등이 노출될 수 있어, 어지간하면 보상 합의로 소송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실제로 증권집단소송의 약 80~90%는 합의로 종결됐고, 변호사(로펌)는 판결이든 합의든 보상 총액의 15~30%를 성공보수로 받았다. 최초 소(訴) 제기자가 집단소송의 대표 당사자(원고)및 소송대리인으로 지정되는 게 당시 규정과 법원의 관행이었다.
60, 70년대 그의 세계는 인권ㆍ반체제 운동과 자유주의의 이상으로 들썩이던 곳이 아니었다. 대신 존슨 정부의 감세와 베트남전쟁 지출로 인한 재정 악화, 인플레 압력, 닉슨 정부의 금태환 정지에 따른 전후 브레튼우즈 체제 붕괴로 기업ㆍ 금융시장이 요동치던 세계였다. 변호사 멜빈 와이스(Melvin Weiss)가 로렌스 밀버그(Lawrence Milberg, 1913~1989)와 함께 뉴욕에 증권집단소송 전문 로펌 ‘밀버그 와이스’를 설립한 게 65년이었다. 이듬해의 개정 규칙은 엄청난 순풍이었고, 주가가 폭락한 주요 기업, 다시 말해 주주들에게 표나게 피해를 입힌 모든 기업이 그의 ‘먹잇감’이었다. 밀버그 와이스는 미국 증권집단소송의 독보적 로펌으로 급성장했고, 사실상 리더였던 와이스는 기업ㆍ금융회사의 불의와 탐욕에 맞서 개인(소액주주)의 권익을 지켜주는 ‘백기사(White Knight)’라는 찬사를 누렸다. 물론 기업들은 그를 ‘거머리(leech)’ 혹은 ‘기회주의자(opportunist)’라 불렀다.(wp, 2018.2.6)
멜빈 와이스는 1935년 8월 1일 뉴욕 유대인 이민자 출신 회계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따라 정육점이며 양복점 같은 동네 가게들을 돌며 장부와 명세서, 영수증, 수입-지출, 수익-손실의 원리를 깨우쳤고, 맨해튼 버룩(Baruch) 칼리지에서 회계학을 전공하던 무렵에는 아버지의 일을 본격적으로 거들었다고 한다. 다시 뉴욕대에서 진학해 법학(59년)을 전공했고, 군 복무 뒤 몇몇 로펌에서 실무를 익히고는 곧장 설립한 게 ‘밀버그 와이스’였다.
민사소송에서 피고의 위법행위와 원고가 입은 손해의 인과관계를 규명하는 이른바 ‘입증 책임’은 원칙적으로 원고에게 있다. 증권집단소송에서도 법원이 소송 성립 여부를 허가할지 말지 결정하는 주요 기준이 그거였다. 1976년 미국 제9항소법원의 ‘블래키Blackie V. 버락 Barrack’ 판결은, 원고의 입증책임을 대폭 경감함으로써 소송 남용의 길을 열어준 판례로 꼽힌다. 기업 허위공시로 손해를 입은 투자자들이 제기한 그 소송에서 법원은 투자자들이 허위공시의 내용을 사전에 알지 못했어도 허위공시의 효과가 이미 주가에 반영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는 만큼 투자자들이 그 공시를 신뢰해 주식을 매수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취지로 원고의 편을 들었다. 투자자 개개인의 허위공시 사전 인지 여부와 주식매수의 인과관계를 확인하기 힘든, 주식시장 같은 공개적 비대면(impersoanal) 시장에서는 시장 신뢰를 전제해야 한다는 원칙, 즉 허위공시의 내용이 투자 결정에 중요한 요소였다는 사실만 입증하면 원고의 입증책임이 성립된다는 판결이었다.(참조: ‘증권집단소송법’ ‘증권집단소송법의 이해’ 삼영사) 저 소송의 승자가 밀버그 와이스였다. ‘시장사기이론 Fraud on the Market Theory’이라 불리는 저 원칙은 연방대법원이 1988년 ‘베이직 판결(Basic Inc. v Levinson)’로 수용함으로써, 증권집단소송 ‘시장’은 또 한 번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76년은 밀버그 와이스에 변호사 윌리엄 르락(William S. Lerach, 1946~)이 파트너로 합류한 해였다. 2년 전 샌디에이고의 한 부동산 금융회사(USFC)를 상대로 벌인 집단소송에서 와이스는 각기 다른 고객(사)들을 대리하는 100여 명의 변호사 군단을 이끌었고, 거기 가담한 변호사 중 한 명이 르락이었다. 훗날 르락은 “덴버의 한 호텔 회의장에서 회의를 주도하던 멜(빈)은 가히 할리우드 스타 같았다. 내 길을 인도해줄 사람을 만났다는 걸 그 자리에서 직감했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주식으로 가산을 탕진한 탓에 어려운 청소년기를 보낸 르락은 기업 소송에 적의에 가까운 ‘호전적 열정’을 지닌 청년 변호사였다. 와이스는 르락을 앞세워 로펌의 샌디에이고 지사를 설립, 그에게 전권을 맡겼다. 뉴욕타임스는 둘의 콤비네이션을 ‘좋은 경찰-나쁜 경찰’의 전형이었다고, “르락이 방대한 소장을 들고 협박과 모욕, 능란한 언론플레이로 기업을 압박하면 와이스가 뒤에서 ‘더 험한 꼴 당하기 전에 합의하자’는 식으로 협상하는 역할을 담당하곤 했다”고 적었다. 와이스는 “기업을 상대할 땐 부드러워 져야 할 때에도 절대 물렁해 보여선 안 된다. 그 일엔 섬세한 균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nyt, 2004.7.11) 필립 모리스, 루슨트 테크놀러지, 애트나, 비자ㆍ마스터카드, 매트라이프, 엑손, 엔론, 프루덴셜, 제록스, 아델피아, 필립모리스 등 담배회사와 도넛 회사 크리스피 크리미 등등이 줄줄이 그들에게 무릎을 꿇었다. 둘은 2004년 결별할 때까지 투자자 및 소비자에게 약 200억 달러에 달하는 보상을 받게 했고, 엔론 등 다수의 기업ㆍ금융회사를 파산시켰다. 로펌은 200여 명의 변호사를 둔 거대 조직으로 성장했고, 와이스와 르락 등 파트너 변호사는 한해 평균 1,000만 달러를 넘는 돈을 벌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수단인 증권집단소송을 “못된 기업ㆍ금융자본주의를 견제하는 균형추”(nyt, 위 기사)라고 방어했지만, 집단 소송이 기업 대상 블랙메일처럼 악용되고 있다는 언론의 비판과 정치권의 부담도 커져갔다. 90년대 실리콘밸리의 벤처기업 및 벤처캐피털회사들도 와이스 군단의 주요 타깃이었다.
1995년 증권소송개혁법이 시행됐다. 대표원고 및 소송대리인의 자격 요건을 강화해 가장 먼저 소를 제기한 자가 아닌 소송의 경제적 이익이 상대적으로 큰 자를 법원이 대표원고로 선임토록 했고, 예상 매출ㆍ수익 등 미래 예측정보는 기업 면책 조항에 포함시켰다. 위법행위에 대한 구체적 내용을 소장에 밝히도록 못박아 혐의나 의혹만으로 무조건 걸고 보는 소송을 막았고, 기업에게는 소 각하 신청 자격을 부여했다. 배상액과 변호사 보수 상한규정도 포함됐다. ‘멜빈 와이스법’이라는 별칭이 말해주듯, 증권집단소송 전문 변호사집단에 족쇄를 채우기 위한 법이었다.(LAT, 2008.6.3)
하지만 95년 법은 와이스-르락에게 또 하나의 도약대가 됐다. 기업ㆍ금융 비리를 조사할 만한 인력과 자금력을 갖춘 로펌은 많지 않았고, 소송의 경제적 이익이 가장 큰 투자자(대부분 기관투자자)들은 거대 로펌을 선호했다. 와이스-르락은 전직 FBI요원까지 고용, 기업 비리를 전담 조사ㆍ감시하는 팀을 운영하며 오히려 시장 지배력을 키웠다. 파산으로 끝난 2001년 엔론과 월드콤 집단소송도 그들의 작품이었다. 엔론 금융사기를 사실상 방조한 시티그룹, JP모건 체이스, BOA(Bank of America) 등에게 ‘음모가담 책임 Scheme liability’을 물어, BOA의 6,900만 달러 등 막대한 배상 합의금도 받아냈다. 90년대 말 그들은 미국 증권집단소송의 약 80%를 독점했다.(LAT, 위 기사)
2006년, 와이스-르락의 아성이 마침내 허물어졌다. 연방 검찰은 그들이 25년간 대리해 온소송 중 약 150여 건에서 다수의 원고에게 1,130만 달러에 달하는 리베이트를 지불한 사실을 적발했다. 검찰은 “(기업 탐욕의 응징이라던) 그들의 소송 역시 탐욕의 기획이었다. 그들은 소송을 통해 법정을 더럽혔고, 수많은 소송 원고들의 이익을 편취했다”고 밝혔다.(nyt, 2018.2.5)
먼저 원고들이, 뒤이어 르락 등 로펌 파트너변호사들이 플리바겐(Plea Bargain, 유죄 인정 사전형량조정제도)으로 잇달아 리베이트 전모를 실토했다. 마지막까지 버티던 와이스도 2008년 유죄를 인정, 추징금 975만 달러와 벌금 25만 달러, 30개월 징역형을 살았다.(르락은 추징금 800만 달러와 24개월 형, 로펌은 추징금 7,500만 달러) ‘소액주주들의 백기사’였던 그들은 ‘불법의 제왕 the king of torts(비리 변호사가 주인공인 존 그리샴의 소설 제목)’으로 불렸고, 당연히 변호사 자격도 잃었다.
그들의 범죄를 ‘피해자 없는 범죄’라며 옹호하는 이들도 있었고, 선처를 호소하는 250여 통의 탄원서도 법원에 전달됐다. 와이스가 민주당 지지자이자 막강한 후원자여서 공화당 주정부의 표적 수사에 희생된 것이라는 의혹도 제기됐다. 세인트존스 대 마이클 페리노 교수는 ‘밀버그 와이스’ 로펌이 진행한 700여 건의 집단소송을 분석, 리베이트 기획으로 원고들이 입은 피해는 극히 미미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사실 그들에 대한 도덕적 비난은 ‘백기사’ 시절부터 따라 다녔다. 그들 스스로도 ‘백기사’라는 찬사가 부담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그들이 법정에서나 언론을 향해 말하던 기업-금융 정의는 로펌 영업과 소송 승리를 위한 변호사들의 수사(修辭)였고, 적어도 그걸 소송의 성과나 지향이 아닌 동력 혹은 동기로 대놓고 미화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르락은 “우리는 천사가 아니다. 남들처럼 우리도 돈 벌려고 일한다.(..) 한 달에 내 아버지가 평생 번 돈보다 많은 돈을 벌기도 한다”고 말했고, 와이스 역시 “내가 돈을 보고 일한다고? 맞다”고도 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와이스는 98년, 나치 홀로코스트 유대인의 재산으로 부를 불린 스위스ㆍ독일 은행들을 상대로 무료변론 집단소송을 제기해 스위스은행 12억 5,000만 달러 등 총 62억5,000만 달러의 배상금을 생존자 및 유족들에게 나눠준 적이 있었다.
맨해튼 지법판사 제드 라코프(Jed Rakoff)의 말처럼 “와이스는 직접 증권집단소송을 창조한 건 아니지만 그 수단의 가치와 힘을 세상에 알린 전무후무한 변호사”였다. 라코프는 “비록 편법과 범죄로 선을 넘긴 했지만 그 중대한 과오에도 불구하고 그들 덕에 심각한 증권사기들이 드러나 피해자들이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뉴욕대 로스쿨 교수 아서 밀러(Arthur R. Miller)는 “힘 없는 투자자들은 거대한 현실적 억지력을 발휘해온 멜 같은 이들 덕에 보다 편히 잠 잘 수 있었고, 기업들도 멜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 조금은 더 신사적일 수 있었다”고 말했다.
2009년 11월 석방된 와이스는 이듬해 말부터 변호사가 아닌 소송 중재자로 활동을 재개했다. 하지만 ‘주업’은 공익사업이었다. 그는 전과자 복지 및 사회 복귀를 도왔고, 유대인으로서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평화 정착 지지그룹인 ‘이스라엘정책포럼(IPF)에서 활동하며 시오니스트들의 호전성을 비판하기도 했다. 2010년 주간지 ‘The Jewish Week’ 인터뷰에서는 “나의 유대인 친구들이 공감능력을 잃어가는 현실이 염려스럽다. 모든 사회, 모든 개인의 가장 큰 적이 국가라는 사실을 그들은 망각하고 있다. 우리는 국가로부터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도 했다. 그와 아내(Barbara Weiss)는 90년대 초 모교인 뉴욕대에 로스쿨 공익재단을 설립, 공익변호사가 되고자 하는 학생들의 학비를 지원했다.
멜빈 와이스가 2월 2일 근위축성측삭경화증(루게릭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82세. 최윤필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