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겹게 찾은 기관서도 의심
사건 유야무야 처리에도 좌절
“즐겼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잖아.”
지난해 5월 서울의 한 경찰서를 찾은 A씨는 귀를 의심했다. 성추행 피해 사실을 신고하기 위해 찾은 여성청소년과의 한 팀장은 책상을 ‘쾅!’하고 수차례 내려치며 “고소장을 써오지 않고 이야기하면 당신이 (성관계를) 즐겼는지 아닌지 알 수가 있겠냐”라며 A씨를 다그쳤다. 생애 첫 경찰서를 찾은 두려움에 웅크렸던 그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나와야 했다. 이후 국민신문고를 통해 경찰의 태도를 신고한 뒤에야 같은 경찰서 내 다른 수사팀을 배정받았다.
2016년 6월 국내 최대 게임회사에 계약직으로 입사한 A씨는 같은 팀 팀장 B씨에게 지속적인 성추행을 당했다. 사내 괴롭힘을 B씨에게 상담하곤 했던 A씨는 어느 날 B씨와 단둘이 술을 마시게 됐다. 만취한 A씨의 집 대문 앞까지 쫓아오던 B씨는 문을 닫으려던 A씨를 밀치고 들어온 뒤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 혼란에 빠져 상황판단이 어려웠던 A씨는 회사와 경찰에 신고할 생각을 하기 어려웠다. 유부남인 B씨는 이후에도 “괴롭히는 직원을 내보내주겠다”, “나만 믿어라. 정직원이 되게 도와주겠다. 사귀자”라며 만남과 잠자리를 요구했다. 거절 의사를 쉽사리 전하기 어려웠던 A씨는 B씨의 구걸에 회사 밖 불편한 만남을 이어갔지만 잠자리를 철저히 거부했다. 이에 화난 B씨가 업무 태도를 지적하며 괴롭히기 시작하자 결국 A씨는 회사와 경찰에 B씨를 신고했다.
그러나 A씨 편은 없었다. 팀장과 친분 있는 임원들을 신뢰하기 어려웠던 A씨는 사내 익명게시판에 제보했지만, 회사측은 징계위원회 없이 B씨를 권고사직 처리했다. A씨는 “징계위원회를 요구했지만 나의 신원 보호를 위한 것이라며 거부했다”라며 “경찰은 증거가 부족하다며 폐쇄회로(CC)TV를 확인하라 했고, 만취한 사람이 그렇게 상세히 진술할 수 있느냐는 등 의심 일관이었다”고 토로했다. 결국 A씨 주장과 정반대로 “연인관계였다”는 B씨의 진술이 받아들여지며 사건은 불기소 처리됐고, A씨는 계약 해지됐다.
성범죄 피해자 대부분은 세 번 좌절한다. 갑작스레 당한 피해 사실이 상세히 기억나지 않고 머리에 맴돌 때, 힘들게 찾아온 경찰ㆍ검찰ㆍ법원ㆍ고용노동부 등 당국이 자신을 피해자로 보지 않을 때, 가해자 사과 없이 마무리된 이 모든 결과를 홀로 떠안아야 한다는 사실을 느낄 때다.
자살시도까지 했었던 한 강간사건의 피해자는 1심 증인심문 과정에서 가해자측 변호사에게 “왜 동맥을 끊지 않고 정맥을 끊었냐, 죽고 싶지 않았던 것 아니냐”는 말까지 들었다. 피해자의 저항이 부족했다는 이유로 가해자는 무죄판결을 받았다.
서울 시내 한 빌딩 청소노동자 C씨는 지난해 야간조로 복도 청소를 하던 중 봉변을 당했다. 자신에게 말을 걸던 청소 반장은 갑자기 가슴을 주물렀고 이후 한 차례 더 피해를 입었다. 회사에 신고했지만 “반장을 해고하긴 어렵다”는 말만이 돌아왔고, 그는 서울의 한 노동지청에 신고했다. 하지만 2주째 어떤 조사도 없어 찾아간 그는 근로감독관으로부터 “사측이 조치를 취할 예정이니 취하서를 써라”는 말만 들었다. 그 후 사측의 인사 조처는 없었고, C씨가 서울여성노동자회의 도움을 요청한 뒤에야 노동지청의 진정인 조사와 함께 반장의 퇴사가 이뤄졌다. 황현숙 서울여성노동자회 부회장은 “조사를 시작하기에 앞서 무혐의 가능성을 언급하며 피해자를 위축시켜 아예 신고 접수조차 생각하지 못하는 여성이 많다”라며 “직장 내 성희롱을 담당하는 고용부 근로감독관들 대부분 신고 건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성희롱에 대해서는 피해자 심리에 대한 이해도가 낮고 업무 처리도 서투르다”라고 말했다.
피해자의 복잡한 심리상황이 수사과정에 제대로 관철되지 않는 경우도 아쉬운 대목이다. 서혜진 한국여성변호사회 변호사는 “가장 흔하게 피해자와 가해자가 사건 이후 일상적으로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은 것을 피해자에게 불리한 증거로 본다”라며 “피해자는 어떻게 대처할지 모르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가해자에게 티를 내지 않고 일상을 유지하려는 성향이 있다는 점을 간과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피해자는 일상을 유지해선 안돼. 몸져누워야 하고 바로 항의했어야 해’라고 여기는 등 사법부에서 피해자가 가져야 하는 피해자다운 ‘상’이 있는 것으로 보일 정도”라고 지적했다.
정준호 기자 junho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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