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3월 7일 대통령령으로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가 설립됐다. 60년대 말 시작된 농촌근대화 ‘사업’이 국가적 ‘운동’으로 본격 전환했다. 1962년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10년 뒤의 ‘새마을운동’은 박정희 정권 ‘조국 근대화’의 양대 엔진이었다.
농촌근대화 사업은 1969년 11월 ‘농촌근대화촉진법’으로 시동이 걸렸다. 이스라엘에서 유학한 농업 전문가 류태영(1936~, 전 건국대 부총장)의 건의로 시작된 농촌 계몽 및 환경 개선 사업은 정권으로서는 단시일 내에 가시적 성과를 낼 수 있는 매력적 정책이었다. 농촌을 조직화함으로써 광범위한 정권 지지기반을 조성하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취약한 농촌의 반공ㆍ안보 체제를 구축할 수도 있었다. 내무부에 전담 조직이 신설됐고, 농협 조직(농협대학 내)을 활용한 지도자 양성 교육이 시작됐다. 근면 자조 협동의 3대 이념이 선포됐다. “새벽 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로 시작되는 ‘새마을 노래’가 새벽 기상시각에 맞춰 전국에 울려 퍼졌다. 협의회는 저 ‘운동’을 기획하고 저변을 넓히는 중심 조직으로, 관련 예산 편성과 집행을 주도했다.
새마을운동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초가 지붕의 슬레이트화 등 주택 개량과 흙길 포장 등이 경쟁적으로 추진되면서 농촌의 풍경을 획기적으로 바꿨고, 미신 등 낡은 문화 및 관습의 계몽에도 기여했다. 트랙터 이양기 등 마을 단위 농업 기계화로 제한적이나마 농업생산성도 향상됐다. 무엇보다 노랫말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처럼 농촌이 모처럼 활기를 띠었다. 77년에는 상공부 주도로 공장새마을운동추진본부가 설립돼 그 열기가 산업 현장과 도시로 확산됐다. ‘새마을’은 북한의 천리마처럼, 거역할 수 없는 범국민적 구호가 됐다. 권력집단으로서는, 병증이라고 해야 할 집단주의의 병폐조차 매력적인 부산물이었을 것이다.
전두환 신군부는 80년 12월 ‘협의회’를 ‘중앙본부’로 바꿔 민영화, 동생 전경환을 수장으로 앉혀 관변단체로 전환했다. 중앙본부는 88년 비리 등 혐의로 단죄 당했고, 이듬해 단체는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로 되돌아갔다가 2000년 ‘중앙회’로 개명했다. 지금도 중앙회는 지원육성법을 근거로 국가의 예산 지원을 받는 관변단체로 명맥을 잇고 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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