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 금융실명법 개정키로
계좌 개설시기에 관계없이 과징금 부과
탈법 목적 차명거래 경제적 징벌
과징금 31억 부과한 이건희 회장
나머지 계좌 1202개도 과징금 소급 검토
CJㆍ신세계 등 10여곳 부과 가능성
이건희 삼성 회장에게 차명계좌 과징금 31억원이 부과된다. 2008년 4월 삼성 특검으로 이 회장의 차명계좌가 드러난 지 10년 만이다. 그러나 이는 반쪽 제재에 불과하다. 특검과 금융감독원의 조사로 드러난 이 회장의 차명계좌는 1,229개에 달하지만 현행 법으론 금융실명제(93년 8월12일) 이전에 만들어진 27개 차명계좌에만 과징금을 물릴 수 있다. 2조원이 넘는 차명계좌(2007년12월말 기준)를 운용했는데도 과징금 수준은 대폭 쪼그라든 이유다.
이에 정부는 ‘금융실명법’을 개정해 앞으로 차명계좌에 대해선 개설 및 실명 전환 시기와 상관 없이 무조건 과징금을 물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특히 금융실명제 이후 개설된 이 회장의 나머지 차명계좌에 대해서도 과징금을 부과하기 위해 소급 적용 방안도 논의하기로 했다. 이 경우 그 동안 차명계좌로 검찰 수사를 받은 CJ, 신세계, 동부건설, 빙그레 등 10곳에도 과징금이 부과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된다.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은 5일 이 같은 내용의 이 회장 차명계좌 검사 결과와 금융실명제 제도개선 추진방향을 발표했다. 김용범 금융위 부위원장은 “향후 입법 과정에서 제도 개선 취지가 최대한 반영될 수 있도록 소급 적용을 포함한 모든 방안을 국회와 적극 협의하겠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또 징수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현재 계좌잔액의 50% 수준인 과징금 상한을 더 높이고 과세당국이 직접 과징금을 걷는 방안도 추진하기로 했다. 그는 다만 “앞으로도 동창계좌처럼 선의의 차명계좌는 과징금 부과 대상이 아닌 만큼 일반 국민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덧붙였다.
이건희 차명계좌 27개 잔액 62억원
금융감독원의 검사결과에 따르면 금융실명제 시행일 당시(93년 8월12일) 이 회장 차명계좌 27개에 찍힌 잔액은 총 61억8,000만원이다. 과징금은 실명법 시행일 당시 통장에 찍힌 잔액의 50%를 부과할 수 있다. 과징금을 물리는 주체는 금융기관이다. 이에 따라 27개 차명계좌가 개설된 삼성증권, 신한금융투자, 한국투자증권, 미래에셋대우 등 4개 증권사는 이 회장을 상대로 30억9,000만원의 과징금을 부과해야 한다. 이 회장이 현재 의식이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금융사가 먼저 국세청에 과징금을 내고 추후 삼성에 과징금을 청구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금감원 조사로 드러난 증권사별 자산총액을 보면 신한금융투자(13개 계좌) 26억4,000만원, 한국투자증권(7개) 22억원, 미래에셋대우(3개) 7억원, 삼성증권(4개) 6억4,000만원 등이다. 차명계좌엔 삼성전자를 비롯해 대부분 삼성 계열사 주식이 담겨 있었다. 당시 계좌 잔액 61억8,000만원 어치의 주식을 2018년2월말 기준으로 평가하면 2,365억원인 것으로 추산됐다.
금감원은 실명제 이전에 만들어진 이 회장의 차명계좌엔 과징금을 물릴 수 있다는 법제처의 유권해석에 따라 지난달 19일부터 이들 증권사에 검사반을 투입해 본점과 문서보관소를 샅샅이 뒤졌다. 검사 초반만 해도 계좌정보를 찾을 수 없을 것이란 비관론이 우세했다. 4개 증권사가 이 회장 차명계좌의 잔액 정보에 대해 ‘25년 전 일이어서 관련 장부가 모두 폐기됐다’고 보고했기 때문이다. 금감원 검사팀은 그러나 문서보관소 등에서 과거 계좌정보가 저장된 CD 등을 찾아냈고 이를 통해 차명계좌의 매매거래내역까지 확보했다. 금감원 관계자는 “과징금 부과대상 금액을 확인한 만큼 과징금 부과절차가 조속히 진행될 수 있도록 국세청 등과 협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 차명계좌 규제 대폭 강화
정부는 이 회장의 차명계좌 논란을 계기로 차명계좌에 대한 처벌 수위를 대폭 높이기로 했다. 현 금융실명법에서 차명계좌는 불법일 것이란 대부분 국민의 상식과는 달리 합법이다. 금융실명법을 보면 ‘실지명의(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의 이름)로 금융거래를 해야 한다’고만 돼 있고 반드시 돈 주인과 계좌 명의가 같아야 한다고 돼 있진 않다. 때문에 금융실명제 이후 정부가 정한 실명전환의무기간(93년 8~10월)에 가명(주민등록번호와 계좌주인 이름이 다른 경우)계좌 등을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어 ‘실명전환’ 했더라도 문제될 게 없다는 게 그간 정부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지난달 법제처가 실명전환의무기간에 차명으로 실명(이름과 주민번호 일치) 전환했더라도 이후 검찰 수사 등으로 실제 돈 주인이 다른 사람으로 드러난 경우엔 과징금 부과 대상이라고 유권해석을 내리면서 기류가 바뀌었다. 정부는 금융실명법을 개정해 앞으로는 기간과 관계 없이 검찰 수사 등을 통해 차명계좌를 둔 사실이 드러나면 과징금을 물리기로 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정부 개정안이 소급 적용되지 않으면 과거 기업 총수들의 차명계좌 등에 또다시 면죄부가 주어질 수도 있다. 정부가 소급 적용을 국회와 논의하겠다고 밝힌 배경이다. 정부 개정안이 소급 적용될 경우 이 회장뿐 아니라 과거 탈법 목적으로 수 많은 차명계좌를 운용한 기업 총수들에게도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차명계좌로 검찰 수사를 받은 대기업은 CJ, 신세계, 동부건설, 빙그레 등 10곳이 넘는다. 특히 지난해말 국세청이 공개한 명단에 따르면 이재현 CJ 회장은 CJ주식을 차명 보유하면서 차명계좌를 통해 양도소득ㆍ법인세 등 251억원을 포탈하다 적발됐다. 신동기 CJ글로벌홀딩스 부사장 역시 이 회장의 차명주식을 관리하면서 배당소득을 숨기는 등의 수법으로 각종 세금 222억5,000만원을 안 냈다. 정부 개정안이 시행되면 이들은 과징금 제재를 추가로 받게 될 걸로 예상된다. 김 부위원장은 “과세기관인 국세청도 적극 나설 걸로 본다”고 말했다.
금융실명법 개정도 빠르게 이뤄질 것으로 기대된다. 여야 모두 문제를 공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금융실명법 개정과 차명계좌 과징금 징수에도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동욱 기자 kdw1280@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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