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예술의 거장들은 작품과 함께 전업 예술가의 가능성과 입지 및 위상을 개척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예술로서의 회화 조각 건축 등 장르를 창조했다. 그들은 교회ㆍ궁전의 위엄과 교황 군주 귀족의 권위를 북돋우는 장식적 도구로 작품을 만들었지만, 자신들을 부리는 이들의 요구에 온전히 갇히지 않았다. 그들의 업적은 당장의 생계와 당대의 명성 너머를 추구하는 예술가적 자의식, 즉 주문자의 욕망과 생활인으로서 추구해야 할 자신의 욕망을 좇고 또 저항하는 과정이자 결과였다. 그 싸움을 멋지게 버텨낸 이들 중 한 명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1475.3.6 ~ 1564.2.18)가 말년에 남겼다는 말- 오늘의 내가 되고자(to gain my mastery) 고생한 걸 죄다 안다면, 내가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을 것이다”-은 그래서 중의적으로 착잡하게 이해되기도 한다.
흔히 저 말은 그의 대표작인 시스티나 성당 천정화나 다비드 상 작업 여건의 열악함과 과정의 노고를 부각하는 자리 끝에, 천재의 노력을 환기하는 의미로 놓이곤 한다. 키 155㎝의 단신인 그가 5m가 넘는 다비드 상을 조각하며 시각적 비례를 구현하기 위해 작업장에서 살다시피 했고, 먹고 씻는 것도 거르면서 들이마셨다는 대리석 가루 이야기, 4년여 간 시스티나 천장화를 그리며 매달려 지낸 탓에 관절염과 척추 곡만, 안료로 인한 눈병과 피부병에 시달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몰락한 귀족 가에서 태어나 집안 반대를 무릅쓰고 조각-회화의 길을 선택한 그는, 20대 초반에 이미 명성을 얻었지만, 생활고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가족은 그의 벌이에 얹혀 살다시피 했고, 주요 고객인 교황청이 주던 보수는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시스티나 성당 작업 땐 급료 지불이 끊겨 1년여 간 작업이 중단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작업에 관한 한 교황의 어떤 요구에는 불응했고, 대신 자신이 작품 안에 들어앉기도 했다. 베드로 성당 피에타 상에 자기 이름을 새긴 게 명시적 예라면, 천장화의 주제를 정하고 작품 사이사이 독창적인 표현- 교황에 대한 조롱까지-을 가미한 것은 암시적인 예일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그 소극적 저항의 결과, 또 스스로에게 만족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싸움이 돌 가루 마시는 것보다 더 고달프기도 했을 것이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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