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계ㆍ영화계ㆍ스포츠계ㆍ학계 심지어 종교계에서도 성폭력 피해자가 나와 #미투 운동이 줄을 잇는데 대한민국 최고 권력이 모인 여의도는 왜 조용한가요?" 국회의원 보좌진이 모인 페이스북 익명페이지 '여의도 옆 대나무숲'에는 요즘 이런 의문들과 함께 "미투야 더 세게 불어라. 부디 국회에도 불어와 달라"는 글이 봇물처럼 올라온다. 하지만 아직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다. 바닥이 워낙 좁은데다 의원이나 보좌관의 권력과 입김이 강한 탓에 피해 사례가 있어도 후환과 2차 피해가 두려워 실명 #미투를 꺼리는 까닭이다.
▦ 차명진 전 자유한국당 의원이 그동안 쉬쉬하던 여의도의 판도라 상자를 열어젖혔다. 그는 지난 2일 SBS라디오 '정봉주의 정치쇼'에 출연, "수컷은 많은 곳에 씨를 심으려는 본능이 있다. 이는 진화론에 의해 입증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성 상품화와 강간, 권력에 의한 성폭력을 구분해 후자부터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얘기인데 당장 "말인지 X인지 알 수 없는 궤변"이란 비난이 나왔다. 본인은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성폭력을 먼저 근절해야 한다는 취지라고 거듭 해명하지만 버스 지나간 뒤 손 흔드는 격이다.
▦ 차 전 의원은 이 발언에 앞서 지방지에 게재한 칼럼에서 "요즘 여러 분야에서 권력에 취한 자들의 추문이 폭로되고 있는데 정치판은 권력 그 자체다. 정치권력에 의해 흩뿌려지는 욕망은 인권을 일부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혼까지 빼먹을 가능성이 크다. 정치판이야말로 미투 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져야 하는 곳이다. 지금 속으로 떨고 있는 정치인들에게 용기있는 폭로의 햇볕을 쬐어야 한다"고 썼다. 수컷 본능을 이야기 한 사람이 쓴 글이라고 믿기 어렵다. 그의 말대로 '여의도 인간'은 확실히 겉과 속이 다른가 보다. 소수자인권과 양성평등을 외치며 차세대 리더를 자처하던 안희정 충남지사가 수행비서를 '사노비'처럼 부리며 수개월동안 성폭행했다는 폭로를 보니 그야말로 수컷본능의 신봉자였다는 생각이 든다.
▦ 얼마 전 여의도 대나무숲에 익명으로 올라온 글 한 토막. "의원님, 미투운동을 응원하신다고요. 좀 놀랐지만 곧 수긍했어요. 본래 정의로운 척, 개념있는 척 잘 하시잖아요. 일상에서는 성차별 발언, 술자리에서는 성희롱 발언을 아무 생각없이 내뱉던 의원님이 제 눈에 선하네요. 전 여전히 그때의 기억과 트라우마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함부로 미투를 응원하네, 어쩌네 하지 마세요." 이 글을 보고 가슴 뜨끔해 주변을 챙기는 의원들이 많을 것 같다. 차 전 의원의 수컷 본능 발언이 여의도 미투운동의 기폭제가 되면 좋겠다. 지지자들의 기대를 배신하고 당의 얼굴에 먹칠한 안희정의 몰락은 그 시작이다.
이유식 논설고문 jtino5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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