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3월 5일, 전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이 미국 미주리주 풀턴시 웨스트민스터대 명예학위 수여식에서 ‘평화의 동력(Sinews of Peace)’이란 제목의 수락연설을 했다. 45년 총선 참패로 노동당 애틀리(Clement R. Attlee) 내각이 출범한 탓에 야당인 보수당 정치인 신분으로 연단에 선 그는, 오히려 그런 정치ㆍ외교적 홀가분함 덕에 속내를 마음껏 털어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약 55분간 이어진 연설 중반에 그는 냉전기 서방 진영의 상투적 수사가 된 ‘철의 장막(iron Curtain)’이란 말을 썼다.
처칠은 전후 자유민주주의 세계가 경계해야 할 두 개의 거대한 위협(giant marauders) 즉 전쟁과 압제를 언급하며, 유럽 각국과 세계가 맞닥뜨린 정세와 미국 영국의 역할을 강조했다.
“(지금 유럽에는) 발트해 슈테틴(Stettin)에서부터 아드리아해의 트리에스테(Trieste)까지, 대륙을 질러 철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 장막 뒤로 중부ㆍ동부 유럽의 유서 깊은 국가의 모든 수도들, 바르샤바, 베를린, 프라하, 빈, 부다페스트, 베오그라드, 부큐레슈티, 소피아와 그 도시의 시민들이, 소비에트의 영역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점점 더 모스크바의 영향력 하에 포섭되고 있습니다.(…) 동유럽 국가의 작은 일부에 불과한 공산주의자 정당들은 수적 비례를 초월해 자신의 영향력을 키워가며 전체주의적 통제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이미 경찰국가들이 도처에, 체코슬로바키아를 제외한다면, 포진했습니다. 거기에 진정한 민주주의란 없습니다.”
2차대전 나치를 무찌른 승전국의 일원으로서, 표면적으론 갈등을 표출하지 않았던 영미와 소비에트 러시아, 특히 영국과 소비에트는 처칠의 저 곤란한 폭탄 발언으로 한때 외교적 마찰을 빚기도 했다. 하지만 서방 진영은 처칠이 던져준 ‘철의 장막’이라는 불투명한 렌즈를 통해 소비에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철의 장막’이란 말을 처칠이 처음 쓴 건 아니었지만, 그 말에 생명을 불어넣은 건 그였다. 학자들 중에는, 그래서 46년의 오늘을 동서 냉전의 공식적인 기점으로 치는 이들도 있다.
정치력에 버금가는 탁월한 언어감각을 지닌 처칠은 51년 총리에 복귀했고, 재임 중이던 53년 ‘제2차세계대전 회고록’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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