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연임 결정은 한은 총재 단임 관행을 44년 만에 깼다는 점에서 파격적 조치로 평가된다. 임명권자인 문재인 대통령의 이 총재에 대한 신뢰와 중앙은행 중립성 보장 의지가 관철된 것으로 풀이된다. 미국의 급속한 금리인상과 보호무역주의 강화라는 경제여건 변화에 맞서 정교하면서도 일관된 통화정책 필요성이 높아진 것 또한 연임 배경으로 분석된다. 시장에선 금리인상이 5월로 당겨질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2일 한국은행과 청와대 등에 따르면 이 총재 연임에는 문 대통령의 의중이 강하게 작용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문 대통령이 ‘다른 나라를 보면 중앙은행 총재가 오래 재임하며 통화정책을 안정적으로 이끌고 있다’며 연임 가능성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이 통화정책의 전문성과 일관성 보장을 글로벌 스탠더드로 받아들였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 총재도 최근 사석에서 “이번 정부는 이전 정부와 달리 통화정책이나 임원 인사에 있어 한은의 뜻을 존중하고 간섭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총재가 지난 4년 동안 보여준 능력과 성과도 임명권자의 신뢰를 얻은 주요인으로 보인다. 1977년 입행 이후 조사국장, 통화정책 담당 부총재보, 부총재 등 핵심 요직을 거친 정통 ‘한은맨’인 이 총재는 2014년 취임 이후 다섯 차례에 걸쳐 기준금리 인하를 통한 ‘한국판 양적완화’를 단행,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와 세월호 참사 등 국내외 악재로 침체된 국내 경기를 회복시키는 데에 기여했다.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최종구 금융위원장 등 국내 경제ㆍ금융정책 수장들과 관계가 원만한 것도 연임에 힘을 보탠 것으로 풀이된다. 10년 전 이 총재를 글로벌 금융위기 대응 파트너로 만나 인연을 이어온 김 부총리는 취임 후 8개월 동안 이 총재와 5차례나 회동하며 현안을 논의해왔다. 최 위원장은 이 총재와 동향(강원도) 출신으로, 강원 출신 서울 시내 대학생 기숙사인 ‘강원학사’에서 처음 만나 꾸준히 교류해왔다.
신중하고 정제된 어휘의 경기 평가 및 전망 발언으로 시장과 소통하며 경제주체들의 기대를 안정적으로 이끈 능력도 이 총재의 강점으로 꼽힌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이 총재는 토씨 하나까지 섬세하게 신경 쓰는 언어감각을 지녔다”며 “한은 안팎에서 그만큼 정확하고 신중한 메시지를 시장에 던질 수 있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총재가 주요국 중앙은행과의 교류 강화에 공들여 온 것도 연임 성공의 자산이 됐다. 특히 지난해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ㆍ사드) 배치로 인한 한중 갈등 국면에서 양국 통화스와프 재연장을 성사시킨 데 이어 캐나다, 스위스 등 기축통화국과 잇따라 통화스와프 계약을 체결하며 외환안정성을 강화한 것은 치적으로 꼽힌다.
한편에선 이 총재의 연임에 상당한 운이 작용했다는 평가도 내놓는다. 현 정부 출범 직후 대선 공신이자 유력한 총재 후보로 꼽히던 조윤제 서강대 교수가 주미대사로 임명되며 강력한 경쟁자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청와대 관계자도 “최종후보로 압축된 서너 명 중에 이 총재의 경륜과 경험을 월등히 앞선다고 볼 만한 분이 없었다”고 말했다.
임기 8년을 보장받게 된 이 총재는 청문회를 거쳐 4월부터 시작될 임기 후반기에 경기 회복세를 살리면서도 국내외 여건 변화에 맞서 금융안정을 도모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특히 지난해 11월 말 기준금리 인상을 통해 첫걸음을 뗀 ‘한국판 출구전략’의 속도조절이 당장의 숙제다. 오랜 저금리 정책으로 가계 및 기업부채가 급속히 불어나고 한미 금리 역전이 현실화되고 있어 통화긴축이 필요한 상황이지만, 금리인상을 서둘렀다간 자칫 소비ㆍ고용 부진, 미국 통상압력 등에 직면한 경기회복세를 꺾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총재도 연임 지명을 받은 뒤 “우리 경제를 둘러싼 여러 가지 대내외 여건이 워낙 엄중해 개인적 기쁨보다는 책임에 막중함을 절감한다”고 말했다.
시장에선 이 총재 연임 결정이 한은의 추가 금리인상 속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하고 있다. 이 총재는 지난달 28일 금융통화위원회에서 임기 1기 마지막 금리결정 회의를 주재하며 “당분간 물가상승 압력이 크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며 위원 7인 만장일치로 현행 금리(연 1.50%)를 동결했다. 이후 시장에선 하반기 추가 금리인상 관측에 힘이 실렸다. 그러나 이 총재 연임으로 새 총재라면 불가피하게 겪게 될 ‘학습 기간’이 필요 없어 진데다가, 이 총재가 최근 미국 보호무역주의 강화에 대해 강한 톤으로 우려를 표명한 점 등에 비춰볼 때 금리 인상 시기가 5월 금통위로 당겨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이훈성 기자 hs0213@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