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업 기반 시대에 부합하는 디지털 비즈니스 모델 필요
#1. 지난달 중순 설 연휴 기간 가족과 한국을 찾은 싱가포르인 사무엘씨는 여러 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주일 가량 서울과 동계올림픽이 개최된 강원도 평창, 강릉 지역을 관광하면서 택시공유 서비스를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랩, 우버 등 공유 경제를 상징하는 호출형 택시 서비스가 보편화된 싱가포르 및 인근 동남아 국가들과 사뭇 다른 교통 환경이 낯설게 느껴졌다. 사무엘씨는 “나라마다 대중 교통 시스템에 차이가 있겠지만, 정보기술(IT) 강국으로 유명한 한국에 택시 공유 서비스가 도입되지 않은 점은 의외였다”고 말했다.
#2. 태국의 수도 방콕에서 영어 강사로 근무하는 미국인 루카스씨는 여행 마니아다. 공유 경제 서비스는 동남아 이곳 저곳을 탐험하는 루카스씨의 경제적 부담을 톡톡히 덜어주고 있다. 에어비앤비를 통해 합리적 가격으로 숙소를 예약하는 한편 사무실 공유 서비스를 이용해 장소에 얽매이지 않고 화상 수업을 진행할 수 있게 된 덕분이다. 이와 함께 캐리어 공유 서비스에 가입해 회원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현지에서 구해 줌으로써 여행비용 또한 일부분 충당한다. 루카스씨는 “동남아 전반의 공유 경제 서비스 발전 속도에 놀라울 따름”이라고 귀띔했다.
흔히 물품을 나눠 쓰는 협업 소비에 바탕을 둔 경제 활동을 뜻하는 ‘공유 경제(sharing economy)’. 공유 경제는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 이후 소유에 초점을 맞춘 지금까지의 경제 질서를 바꿀 수 있는 아이디어로 평가 받으며 영향력을 키워 왔다. 기존 사업자들과의 이해 관계 충돌 및 현행법 위반 논란 등에도 불구하고 차량, 숙박, 사무실 공유 서비스 등을 앞세워 일상 속으로 급속히 파고들고 있다. 동남아는 전세계에서 공유 경제 열풍이 가장 거센 지역 중 하나다.
동남아 공유 경제의 선두 주자로는 싱가포르에 본사를 둔 그랩(Grab)이 우선 꼽힌다. 2012년 말레이시아에서 택시 예약 서비스를 처음 선보인 그랩은 동남아의 만성적 교통 체증을 해결해 줄 대안으로 각광 받으며 폭발적인 성장가도를 달렸다. 그랩은 현재 베트남, 필리핀, 미얀마 등 역내 8개 국가 140여개 도시에서 차량 공유 서비스를 운영하며 70%가 넘는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유니콘 스타트업’(기업 가치가 10억달러를 넘는 스타트업)으로 발돋움한 그랩과 손을 잡으려는 다국적 기업들의 러브콜도 치열하다. 특히 최근에는 현대자동차가 그랩에 대한 전략적 투자를 결정했고, 삼성전자는 그랩과 업무협력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이밖에 인도네시아의 최대 오토바이 및 차량 공유 서비스 스타트업 고젝(Gojek), 말레이시아의 음식 배달, 태국의 개인 맞춤형 여행 스타트업 등도 공유 경제 붐을 확산시키고 있다.
뜨거운 공유 경제 열기는 동남아 디지털 경제의 팽창과 궤를 같이 한다는 분석이 일반적이다. 지난 몇 년간 동남아 대부분 국가에서는 경제 성장에 힘입어 인터넷 사용 인구가 증가하고 스마트폰 보급이 확대되는 등 디지털 인프라가 개선됐다. 이러한 하드웨어 기반 위에 해외 유학파가 중심이 된 젊은 세대가 공유 경제 개념을 들여옴으로써 비즈니스 모델로도 관심을 모으게 됐다는 설명이다. 여기에 동남아 사회의 공유 경제에 대한 개방적 인식도 빼놓을 수 없다. 실제 글로벌 여론조사 기업 닐슨에 따르면, 동남아시아인들은 인도네시아(87%), 필리핀(85%), 태국(84%) 등 전세계 평균 66%를 훌쩍 뛰어넘는 적극적인 공유 경제 수용 의사를 내비치고 있다.
공유 경제의 물결 속에 동남아에는 그랩처럼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 지속적으로 등장할 전망이다. 즉 IT와 협업 정신을 현실에 접목시킴으로써 일상의 점진적 개선을 꾀하는 시도들이 줄기차게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이는 자본력과 현지 네트워크에서 앞서는 중국, 일본 등 경쟁국들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한국에도 반가운 뉴스가 될 수 있다. 한국이 진작에 경험한, 혹은 비교 우위를 갖춘 디지털 기술을 내세워 시장의 문을 두드려 볼 수 있는 까닭이다. 벌써부터 현지 금융권, 통신업계 및 벤처캐피털 등과 손잡고 공유 경제 서비스를 구현할 콘텐츠 및 플랫폼을 제공하는 한국 스타트업들의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동남아 진출의 새로운 패러다임 공유 경제가 몰고 올 변화에 더욱 주목해야 할 때이다.
방정환 아세안 비즈니스 센터 이사 / ‘왜 세계는 인도네시아에 주목하는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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