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킴 가르친 김경석 교사
인구 5만 명의 작은 소도시 경북 의성에서 같은 학교를 다닌 선후배, 친구들이 방과 후 활동으로 컬링을 시작해 세계 정상에 섰다. 평창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여자 컬링 대표팀이 ‘신데델라’로 불리는 이유다. ‘팀 킴(Team Kim)’ 5명 중 막내 김초희(22)를 뺀 스킵 김은정(28), 리드 김영미(27), 세컨드 김선영(25), 서드 김경애(24)가 의성여고 출신이다.
그러나 12년 전 의성여고에서 이들에게 컬링을 처음 가르친 김경석(53) 신라중 교사는 “제자들이 대견하지만 동화 같은 스토리에만 초점이 맞춰져 그들의 치열한 노력이 희석된 건 조금 아쉽다”고 말했다.
김 교사는 1990년대 한국에 컬링을 처음 들여온 김경두(62) 전 대한컬링경기연맹 회장의 동생이다. 그 역시 형을 따라 일찌감치 컬링을 배웠다. 의성에 컬링 전용 훈련장이 생긴 2006년에 의성여고로 부임해 김은정, 김영미, 김선영, 김경애를 발굴했다. 여자 컬링 선수들은 지금도 가장 존경하는 사람 중 한 명으로 김 교사를 꼽는다. 그는 한국인으로는 유일한 평창올림픽 컬링 국제심판이었다.
지금의 ‘팀 킴’은 2009년 처음 구성됐다. 김은정, 김영미가 대학에, 김경애와 김선영은 의성여고에 입학한 해였다. 포지션도 지금과 똑같았다. 김 교사는 “아이들을 주니어 대표로 만든 뒤 국가대표로 키우겠다는 목표를 세웠다”고 밝혔다.
문제는 훈련 시간이었다. 팀워크가 생명인 컬링은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춰야 하는데 대구 소재 대학 기숙사에서 살던 김은정과 김영미는 평일에 의성으로 훈련하러 갈 수가 없었다. 두 선수는 대신 금요일마다 의성으로 와 금요일 오후, 토요일 오전과 오후, 일요일 오전까지 4차례 집중 훈련을 소화하고 다시 대구로 돌아가는 생활을 대학 내내 반복했다. 김 교사는 “신입생 때 얼마나 하고 싶은 일이 많았겠느냐. 둘은 컬링에 청춘을 바쳤다”고 했다. 시험기간 등 특별한 이유 아니면 언니들은 한 번도 훈련에 늦거나 불참하지 않았다. 누가 차비, 식비를 대준 것도 아니고 대학 졸업 후 갈 수 있는 실업 팀도 없었는데 그저 컬링이 좋아서였다. 경북체육회 실업 팀은 2012년 생겼다. 김 교사도 주말에 경주에 있는 집 한 번 못 가고 컬링 지도에 ‘올인’했다. 김은정은 “금요일 오후에 의성 가는 기차 안에서 영미와 김밥으로 끼니 때우던 일이 새록새록 하다”며 “물론 컬링을 하느라 포기한 게 많지만 그만큼 컬링이 즐거웠고 기량도 가파르게 늘었다”고 기억했다.
‘팀 킴 주니어’는 국제무대 데뷔전이었던 2010년 1월 일본 대회에서 예상 밖 선전을 펼쳤다. 당대 주니어 챔피언이었고 성인 무대에도 진출해 있던 중국 팀을 결승에서 만나 대등하게 싸웠다. 아쉽게 졌지만 처음 보는 한국 팀의 선전에 참가국들이 깜짝 놀랐다.
준우승 후 김 교사는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땅덩어리가 우리나라 반 밖에 안 되는 덴마크(당시는 덴마크가 최강)가 세계 컬링을 호령하고 있다. 의성 출신인 너희가 못 할 이유가 없다.”
그 때만 해도 선수들은 “에이, 우리가 어떻게요”라며 웃어넘겼다. 김 교사는 “아이들은 스스로를 믿지 않았지만 가능성을 본 나는 끊임없이 비전을 제시했다”고 밝혔다. 2009년 10월 캐나다로 해외전훈을 갔을 때 김 교사는 선수들을 데리고 그 해 동계올림픽이 열리는 경기장을 일부러 찾았다. 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인 리치몬드 오벌 앞에서 찍은 사진 속에 천진난만하고 앳된 소녀들이 웃음 짓고 있다. 김은정은 “그 때는 ‘여기가 올림픽 개최지구나’라는 생각만 했지 우리가 나중에 꼭 올림픽에 가자는 결의 같은 건 솔직히 없었다”고 털어놨다.
누가 알았으랴. 9년 뒤 이들이 평창올림픽에서 아시아 최초의 은메달을 거머쥐며 한국뿐 아니라 세계를 놀라게 할 거라는 걸. 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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