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사회에 나갈 준비도 안 됐는데 벌써 졸업이라니 얼떨떨하다. 그래도 축하 현수막을 만들어 준 친구들 덕분에 힘을 얻었다.” 지난 9일 학위수여식이 열린 서울 노원구 서울여자대학교에서 졸업생 최예원(25)씨가 현수막을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영화 ‘신과 함께’ 포스터를 합성한 현수막엔 그와 친구들이 주인공으로 묘사돼 있었다. “아무도 본 적 없는 취준(취업 준비)의 세계가 열린다”라는 으스스 한 예고와 함께.
젊은 세대의 관심사부터 사회, 정치적 이슈까지 다양하게 담아내는 졸업 현수막은 언제부턴가 대학 졸업식의 필수 소품이 됐다. 졸업을 향해 달려온 과정이 만만치 않았고 졸업 후 감당해야 할 현실 또한 무겁지만 현수막에 담은 축하의 표현만은 가볍고 유쾌하다. 2018년 졸업 현수막에 비친 대한민국의 시대상은 어떤 모습일까? 지난 9일부터 26일까지 학위수여식이 열린 서울시내 대학들을 찾아가 보았다.
#1 올림픽의 감동… 컬링은 단연 ‘대세’
평창동계올림픽의 감동이 대학가 졸업 현수막으로 옮겨 왔다. 기대 이상의 선전을 펼친 우리 컬링 여자 대표팀은 현수막 소재로서도 단연 인기를 누렸다. 선수들의 사진과 함께 ‘OO야 가야 돼 가야 돼~ 이젠 졸업, 해야 돼~’와 같은 외침을 담은 컬링 패러디 현수막은 곳곳에서 훈훈한 웃음을 선사했다.
서대문구 연세대학교에선 스피드스케이팅 팀 추월 경기를 떠올리게 하는 합성 사진이 걸려 눈길을 끌었다. ‘너의 질주를 응원해’라는 문구와 함께 활짝 웃는 졸업생을 앞세우고 사이 좋게 달리는 모습은 ‘왕따’ 논란을 빚은 여자 팀 추월의 불편한 기억을 씻어버리기에 충분해 보였다. 개ㆍ폐막식에서 화제가 된 인면조와 고구려 벽화 속 인물들도 현수막에 등장해 올림픽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실감케 했다.
#2 비트코인 열풍의 흔적도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비트코인 열풍이 경제적 약자인 청년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만은 사실이다. 대학가 졸업 현수막에서도 이 같은 열풍의 흔적이 엿보였다. 비트코인 투자자 사이에서 쓰이는 ‘떡상(급등)’ ‘떡락(급락)’ 또는 ‘존버(가격을 회복할 때까지 최대한 버팀)’ 등의 신조어가 졸업 축하 인사로 변신했다. 아르바이트와 휴학, 취업준비 등으로 힘들었던 대학시절을 ‘존버’했음을 축하하는 동시에 비트코인 장세를 빗댄 널뛰기 그래프를 동원해 졸업이 인생 ‘떡상’의 계기가 되길 기원했다.. “비트코인에 투자했다가 지금은 강제 ‘존버’ 중”이라는 홍익대 졸업생 신민섭(28)씨는 22일 ‘그래도 졸업은 온다’라고 쓴 축하 현수막을 들고 친구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하루빨리 ‘존버’를 탈출할 날이 오길 바라며.
#3 졸업은 ‘수퍼 그뤠잇’ 취준은 ‘속상 스튜핏’
‘기승전취업’이다. 유행어를 차용한 익살스러운 문구와 현란한 패러디에도 졸업과 함께 맨몸으로 취업 전선에 내몰린 그들의 현실은 묻어난다. 졸업을 ‘취준생으로의 진화’로, 대학원 진학은 ‘노예로의 전직’이라 표현하며 축하를 건네는 자조적인 현수막도 보인다. 어렵게 성공한 취업을 축하하는 방식도 다양하다. ‘서러운 취준생’ 신세를 탈출해도 ‘서러운 직장인’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음을 위로하거나 ‘워! 라! 밸!(Work and Life Balance, 일과 삶의 균형)’을 추구하는 새로운 직업관도 현수막에 녹아 있다. 막연하고 추상적인 꽃길보다 ‘이제 돈길만 걷자!’는 현수막도 눈에 띈다.
#4 졸업, 축하한다 하지 아이 하니?
졸업 현수막의 홍수 속에서 흥행에 성공하기 위한 경쟁도 치열하다. 요즘 ‘핫’한 유행어나 친숙한 영화 속 장면이 현수막에 자주 등장하는 이유다. ‘대세 예능인’이라는 김생민의 ‘수퍼 울트라 그뤠잇’과 ‘졸업 가즈아!’는 올해 졸업시즌 대학가에서 가장 자주 등장한 표현에 속한다. 영화 ‘범죄도시’에서 나온 투박한 연변 말투 역시 섬뜩한 표정의 주인공 사진과 어우러져 특별한 졸업의 추억을 만들어냈다.
#5 청소 노동자들의 현수막도
25일 졸업 축하 현수막이 빼곡히 들어선 연세대학교엔 붉은 현수막 여러 개가 함께 내걸렸다. 학교의 인력 축소 방침에 반발해 본관 점거 농성 중인 청소ㆍ경비 노동자들이 건 구조조정 철회 촉구 현수막이다. 사회 진출을 앞둔 예비 노동자들의 눈에 노동자의 생존권을 담보로 한 고용 갈등이 어떻게 비칠지 궁금하다.
이 학교에 걸린 “부모님 감사합니다. 아들이 드디어 졸업합니다”라는 현수막에는 초등부터 대학 졸업까지 부모님이 뒷바라지해 온 20년 학생 인생이 ‘약력’으로 정리돼 눈길을 끌었다. 이 밖에도 현수막 대신 기부쌀 화환을 주고받거나 아이돌이 등장한 현수막도 등장했다.
박서강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김주성기자 poem@hankookilbo.com
박미소 인턴기자
김희지 인턴기자(이화여대 사회학과 3)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