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현 검사 폭로로 촉발
한국 사회 뒤흔든 ‘핵폭탄’
약자들이 불이익 감수하고 연대
가해자 대다수가 진보인사 충격
“개인윤리만 기대서는 안 돼
조직이 책임지는 시스템이 우선”
치가 떨렸다. “수시로 가슴이 조여오고… 피가 발바닥에서부터 거꾸로 솟구쳐 올랐다.”(서지현 검사). 불의를 견딜 수 없어 “괴물을 키운 뒤에 어떻게 괴물을 잡아야 하나”(최영미 시인) 고뇌했다. 어렵게 용기를 냈다. “많은 후배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선배가 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김수희 극단 미인 대표)했기 때문이다. “피해자를 스스로 숨게 만들어 가해자들이 안전할 수 있는 세상은 이제 끝나야 한다”(연극배우 송하늘씨)는 생각에도 폭로를 결심했다.
1월 29일 서지현 검사의 폭로로 촉발된 ‘미투(Me Tooㆍ나도 당했다) 운동이 한 달 만에 한국사회 전체를 흔드는 핵폭탄이 됐다.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어도, 누구도 피해 사실을 함부로 언급할 수 없는 사회에서 용기를 낸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현상이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며 한국문단의 큰별로 인식됐던 고은 시인을 비롯해 이윤택, 오태석 연극연출가, 배병우 사진작가, 유명 배우 오달수・조민기씨 등 문화계 유명인사들의 성폭력이 널리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불의한 상황에 맞선 이들의 연대는 장기적으로 우리사회에 약이 될 것이라 전망한다. 심영섭 대구사이버대 상담심리학과 교수는 미투 운동이 “개개인의 산발적 고발”이 아닌 “집약적이고 연대적인 폭로”였다는 데 상당한 의의가 있다고 봤다. 한 사람의 피해 진술이 다른 사람의 기억을 끌어냄으로써 일종의 “기억의 연대”를 이룬다는 것이다. 심 교수는 “이런 경험은 현재 이 땅의 청년들에게 매우 중요하다”며 “우리는 권력형 성범죄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 학습돼 있는데 상사이기 때문에, 밥줄이 걸려 있기 때문에, 강간이 아니라 성희롱이기 때문에 참고 넘어갔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금 마치 최면이 풀리는 것처럼 집단으로 깨어난 거”라며 “각성한 사람은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덧붙였다.
오혜진 문화평론가는 가해자들의 면면을 주목했다. 오 평론가는 미투 운동이 한국 사회에 이토록 큰 충격을 던진 원인으로 “가해지목자의 대다수가 진보 진영 인사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민주화의 주역으로, 보수 진영에 비해 늘 도덕적 우위를 점하던 진보 진영이 성폭력 가해자라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오 평론가는 미투 운동이 폭발한 데 대해 “이 사회에 만연한 강간문화”를 먼저 지적하며 “그게 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가 진보 진영의 도덕적 나르시시즘 때문”이라고 했다. 오 평론가는 “1987년 민주화 이후 진보 진영의 도덕성은 의심 받은 적이 없으나 지금 이렇게 여성들의 비명이 터져 나오는 시점에서 과연 그 민주화가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오 평론가는 “문화예술계 성폭력 고발은 2016년 해시태그 운동 때 이미 시작됐고, 양상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며 “그때와 지금의 차이라면 최근 김어준씨의 ‘미투 운동 공작론’이다. 성폭력 고발에 ‘진보진영을 분열하려는 획책’이란 프레임을 씌웠다는 것 자체가 진보의 뜻을 재정의해야 한다는 반증”이라고 주장했다. 방송인 김어준씨는 며칠 전 팟캐스트 방송에서 미투 운동과 관련해 “그 타깃은 결국 문재인 정부, 청와대, 진보적 지지층”이라고 주장해 논란을 일으켰다. 미투 운동에서 호명된 가해자들 중 상당수가 문재인 정권 지지자임을 염두에 두고 한 이 말에,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피해자들의 인권에 무슨 진보, 보수가 있느냐”고 공개 비판했다.
미투 운동의 강력한 파장이 피해자들에 대한 가해로 이어진다는 우려도 나온다. 피해자에게 폭로를 강요하거나, 용기를 내서 폭로를 하더라도 그 진위를 의심하는 사람들 때문에 피해자들이 위축된다는 것이다. 27일 배우 엄지영씨는 배우 오달수씨의 성폭력을 고발하기 위해 한 방송에 출연하며 “실명과 얼굴을 공개 안 하면 없었던 일처럼 될 것 같았다”고 토로했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는 미투 운동이 “개인의 윤리에 기대는 방식으로 흘러선 안 된다”며 “성폭력 문제에선 반드시 조직에 책임을 물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최근 미투 운동과 더불어 확산되는 ‘미 퍼스트(Me firstㆍ성폭력을 방관하지 않고 먼저 나서서 막겠다는)’ 운동에 대해 “성폭력에서 제3자의 역할이 중요한 건 말할 필요도 없다”며 “그러나 개인의 도덕성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미 퍼스트’가 현실적으로 가능할지 의문”이라고 했다.
홍 교수는 “남자들에게 ‘미 퍼스트’ 선언을 시킨다고 실제로 나서서 성폭력을 말릴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라고 반문하며 “그것보단 조직에 책임을 지게 하는 시스템이 우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령 조직에서 성폭력 교육을 할 때 무엇이 성폭력인지 구분하는 것에서 더 나가 주변 사람은 어떻게 대처할지도 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피해자는 편 들어주기를 바라는 반면 어떤 피해자는 침묵을 원해요. 그렇기 때문에 훈련이 필요합니다. 외국에선 시뮬레이션을 통해 성폭력 대처 방법을 훈련합니다. 이렇게 할 때 가장 좋은 점은 성폭력의 책임이 개인이 아닌, 조직에게 있다는 인식을 심어준다는 겁니다.”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