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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2ㆍ28 사건(2월 28일)

입력
2018.02.28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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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대만 본성인 기반의 민진당 차이잉원 총통의 취임식 식전행사에서 선본 2ㆍ28 사건 상징극의 한 장면. 자료사진
2016년 대만 본성인 기반의 민진당 차이잉원 총통의 취임식 식전행사에서 선본 2ㆍ28 사건 상징극의 한 장면. 자료사진

타이완 장제스(蔣介石) 국민혁명군이 한 달여 동안 수도 타이페이 시민 2만여 명을 학살한 이른바 ‘2ㆍ28사건’이 1947년 2월 28일 시작됐다. 타이완 본성인(本省人)에 대한 외성인(外省人)들의 차별과 탄압으로 촉발된 2ㆍ28 시위-진압사건이었지만, ‘토벌’이나 다름 없는 사태였다. 국공내전의 패배로 1949년 5월 정부를 타이페이로 이전한 국민당 정권은 이후 근 40년 계엄통치를 통해 저 사건에 대한 언급조차 금했다.

타이완 인은 크게 세 집단으로 나뉜다. ‘고산족’이라 불리는 원주민(전체 인구의 약 2%)과 명말청초(明末淸初)부터 이주해 살던 본성인(약 85%), 내전 이후 국민당 정부와 함께 옮겨 온 외성인(약 13%)이다. 외성인에 대한 본성인의 원한은 중국 정부가 청일전쟁(1894) 패배에 이은 시모노세키 조약(1895)으로 대만과 부속도서를 일본에 할양한 때부터 깊어져 갔다. 본성인이 겪은 일제 치하 50년 수탈과 고난은 식민지 정부 못지 않게 본토 정부가 책임져야 할 일이었다. 일제 패망으로 권력을 이양 받은 국민당 군대는, 본성인 입장에서는 일제나 다름 없는 사실상 점령군이었다. 일제의 권력과 부와 수탈 시스템을 고스란히 독점한 외성인은 급여 등 모든 면에서 본성인을 차별했다.

47년 2월 27일 타이페이의 한 본성인 여성이 정부 전매품인 담배를 노점에서 판매하다 적발됐다. 단속반원과 경찰은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여성을 무자비하게 폭행했고, 항의하는 시민들에게 발포해 학생 한 명이 숨지는 일이 발생했다. 다음날 군중의 분노가 폭발했다. 국민당 주둔군은 계엄을 선포하며 무력 진압에 나섰지만, 시민들은 무기고를 습격하고 경찰ㆍ군대와 대치했다. 타이완 성 행정장관은 계엄 해제와 진상 규명 등을 약속하며 사태 수습에 나서는 한편, 본토의 국민당 정부에 군 증파를 요청했다. 3월 8일 타이페이에 상륙한 국민당군은 전투를 벌이듯 시민들을 학살했다. 최대 3만 명이 학살ㆍ실종됐다는 주장도 있다.

49년 중화민국 정부를 타이페이로 옮겨온 장제스는 곧장 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령은 그의 사후인 1987년 7월까지 지속됐다. 정부가 공식 사죄한 것은 사건 50년 만인 97년이었다. 타이페이에는 장제스의 ‘중정기념관’과 학살을 기억하기 위한 2ㆍ28 기념공원이 나란히 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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