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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의 책꽂이] 경제 패러다임 전환 필요… 시행착오 받아줄 ‘그릇’부터 만들어야

입력
2018.02.27 04:4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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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병 신한금융그룹 회장의 ‘축적의 길’

축적의 길

이정동 지음

지식노마드 발행ㆍ272쪽ㆍ1만6,000원

▦추천사

중간소득 함정을 돌파한 모범적인 한국 경제의 성장엔진이 식어가고 있습니다. 혁신이 절실합니다. 더 이상 따라갈 교과서가 없는 상황에서 이 책은 혁신 한국을 향해 도전적으로 밑그림을 그리는 능력,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문화적 풍토를 만드는 전략을 구체적 차원에서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조용병 신한금융그룹 회장

적재적소에서 참신한 비유를 구사하는 이 책은 현재 한국 산업의 현실을 로켓에 빗대 ‘1단 엔진 분리 실패, 2단 엔진 점화 실패’로 규정한다. 개발도상국이라는 ‘중력’을 벗어날 수 있는 추진력을 제공했던 1단 엔진이 이미 연료를 소진했음에도 기술 선진국의 ‘우주’로 도약하기 위한 2단 엔진에 불이 붙지 않아 불안한 비행 중인 무거운 로켓, 이것이 바로 한국 경제라는 것이다.

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로 기술경영 전문가인 저자는 명료한 이분법 논리로 ‘실행 단계에서 개념설계 단계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우리 경제의 숙제로 제시한다. ‘1단 엔진’으로 비유된 실행 단계는 선진국의 설계(기술)를 도입해 실행(생산)하는 과정이다. 한국은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실행 단계를 이행하면서 중간소득함정(개도국 1인당 국민소득이 7,500~1만5,000달러 수준에서 장기간 정체되는 현상)마저 돌파한 세계적 모범국가가 됐다.

그러나 ‘2단 엔진’에 해당하는 개념설계 단계,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존재하지 않던 무언가를 그려내는 것, 즉 백지 위에 밑그림을 그리는 일”을 해낼 수 있는 경지로의 도약은 좀처럼 이뤄지지 않고 있다. 5년마다 1%포인트 꼴로 떨어지고 있는 잠재성장률, 20년째 변화가 없는 주력 수출상품과 기업 순위는 한국 경제의 정체를 알리는 비근한 지표다.

사실 이러한 진단은 많은 이들이 공유하는 바다. 4차 혁명이 국가적 담론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현실은 이와 무관치 않다.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와 같은 걸출한 혁신가만 나오면 우리도 금세 기술 선진국 반열에 오를 것이란 기대도 은근하다.

저자는 말과 환상이 난무하는 현실을 향해 “개념설계와 실행에 필요한 역량은 며느리와 쥐며느리만큼이나 다르다”며 위트 있게 죽비를 내리친다. 실행 단계가 ‘조기완수’ ‘선택과 집중’ ‘노하우(know-howㆍ어떻게)’의 영역이라면 개념설계 단계는 ‘시행착오’ ‘독창성’ ‘노와이(know-whyㆍ왜)’가 중시되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영역이라는 것. 전환은 결코 쉽지 않고, 한국은 자칫 저자가 ‘중간혁신함정’이라 명명한 수렁에 더욱 깊이 빠져들 수도 있다.

단순한 묵시록이길 거부하는 이 역저가 내놓는 해법은 ‘축적’이다. “혁신은 ‘시간’이라는 모태 속에서 아주 느리게 부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이라고 정의하면서, 저자는 미국ㆍ유럽ㆍ일본 등 오늘날의 기술 선진국들이 오랜 역사 속에서 개념설계 역량을 축적해온 비결을 제시한다. 고수 육성, 스케일업(scale-upㆍ아이디어 구현) 역량 강화, 제조현장 육성, 기술 네트워크 구축으로 요약되는 이들 비결은 한마디로 기술 축적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시행착오를 넉넉히 받아줄 ‘그릇’을 만들라는 것.

저자는 궁극적으로 시행착오의 위험을 사회 전체가 나누어 지는 ‘위험공유 사회’를 제안한다. 금융시스템 혁신은 그 핵심이다. 산업을 평가할 수 있는 전문적 역량을 길러 도전적인 아이디어에 기회를 제공하는 것, 그것이 기술 선진국을 지향하는 위험공유 사회에서 금융기관이 감당할 몫이다. 이훈성 기자 hs0213@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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