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맹아론 배경
인간의 다양한 욕망 담은
한문소설을 한글로 번역
임형택 교수와 제자들이
요즘 언어로 다시 다듬어
조선 후기 한문 소설들을 번역, 소개한 ‘이조한문단편집’이 다시 나왔다. 1973년 첫 출간된 이 소설집은 18~19세기 한문소설 187편을 발굴해냈다. 지금이야 비교적 널리 알려졌지만 그 당시만 해도 존재 여부조차 잘 모르고 있던 작품들을 당시 50대, 30대이던 한문학자 이우성(1925~2017), 임형택(75)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발굴 소개한 획기적인 자료들이었다. 국문학 전문 연구자들은 물론, 시대물을 쓰는 작가 혹은 옛 소설에 관심 있는 이들까지도 갖춰놓고 보는, 오래된 스테디셀러 중 하나였다.
이 시리즈의 화제성은 참신한 자료의 발굴과 소개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식민사학 극복이란 이름 아래 진행되고 있던 조선후기 자본주의 맹아론과 호흡을 같이 한 것 역시 인기 요인이었다. 이는 작품들을 추려 골라내는 과정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맹아론이란 조선후기 ‘경영형 부농의 출현’이란 키워드 아래 상업과 여항 문화가 발달하고 다양한 욕망과 이야기들이 소비됐다는 줄거리다.
전체 편집도 이 맹아론과 호흡을 같이 한다. 전체 6부로 구성됐는데 1부에서 6부까지 제목이 ‘부’ ‘성과 정’ ‘세태1: 신분동향’ ‘세태2: 시정 주변’ ‘민중기질1: 저항과 좌절’ ‘민중기질2: 풍자와 골계’로 이어지고 있다. 1~6부 제목만 봐도 상업의 발달로 도시가 생겨나면서 인간적 욕망에 대한 금기가 흔들리고, 이에 따라 신분제가 흔들리고 온갖 민중 문화가 태동하고 있다는, 서구적 근대를 따라잡기 위한 모델로서의 자본주의 맹아론과 강한 친화력을 보이는 구조다. 실제 내용도 10년 동안 각방 쓰면서 재산만 악착같이 모으는 부부 이야기, 매점매석으로 떼돈을 버는 장사치 이야기, 애끊는 사랑 이야기, 도망간 노비들이 양반에 맞서 항쟁하는 이야기, 영악한 하인에게 놀아나 바보짓만 하는 얼뜨기 샌님 이야기 등이 즐비하다. 출간 당시 이우성 선생이 이 책들이 문학도들뿐 아니라 “사회경제사상사를 다루는 국사학도들에게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 말한 까닭이다. 별집으로 연암 박지원의 소설 11편은 따로 실어뒀다. 전 4권 가운데 4번째 책은 연구자들을 위해 한문 원문을 고스란히 실어뒀다.
이번 재발간은 예전 번역본이 낡은 번역임을 인정하고 시대 변화를 반영하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 지난 5년간 임 명예교수와 제자들은 수록된 작품들을 처음부터 다시 읽고 모든 문장을 새롭게 매만졌다. 덕분에 책을 펴면 문장들이 모두 순하고 부드럽다. 단편이니 한 작품당 10여쪽을 넘어가는 것이 드물고 각 작품 뒤에는 작품에 대한 출전과 설명은 물론, 작품 자체의 완성도에 대한 간단한 비평도 함께 실려 있다. 좀 더 현대적인 감각으로 문장들을 다시 매만진 만큼 새로운 제목과 편집을 시도할 법도 했으나 ‘이조한문단편집’이라는 기존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어서 그것까지 손대진 않았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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