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에서 상대방에 대한 공손함을 나타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공손한 어휘를 사용하는 게 그 한 가지다. 공손한 어휘라고 다 같은 것은 아니다. 듣는 사람과 상황에 적절하게 단어를 찾아 써야 공손함이 제대로 전달된다. 그뿐만 아니라 한자어과 고유어를 적절히 섞어서 식상하지 않고, 무게 있고, 진심이 담긴 표현을 만들어 내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이외에도 간접적으로 말하기나 돌려 말하기도 공손함을 나타내는 중요한 수단이다.
소위 부드럽게 말하기(softening) 화법을 잘 사용하는 것이 우리말에서는 성공적인 대화의 필수 조건이다. 부드럽게 말하기 화법 중에서 한국인에게 매우 편안하게 인식되며 자주 쓰이는 화법은 ‘말하지 않기’ 화법이다. 상대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고 미소 지으며 대화를 마무리 짓는 것이 이 화법이다. 우리는 어릴 적에 어른들 말씀에 함부로 끼어들면 안 된다고 배웠다. 이렇게 배운 것이 습관이 되어 학생이 되고 사회인이 되어서 우리는 선생님이나 상사가 말할 때 토를 달지 않고 듣고 조용히 수긍하는 데 익숙하다.
한국에서 대형 강의를 한 적이 있다. 강의가 끝난 후 학생들에게 질문이 있는지 물었는데, 고요가 흘렀다. 물론 정말 질문이 없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런 경험을 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나 역시 학생이었을 때 수업시간에 질문을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혹시 나 혼자만 이해를 못한 것은 아닌지 혹은 바보 같은 질문은 아닌지를 생각하다가 결국은 질문할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요즘 한국 대학생들에게 물어 보니, 질문을 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로 다른 사람들이 질문하는 자기에 대해 혼자서 잘난 척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혹은 나의 어리석은 질문으로 다른 학생들이나 교수님의 시간을 낭비하게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들었다. 영어로 강의하는 수업이 많은 요즘은 영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더더욱 질문하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질문하는 것만 어려운 게 아니다. 한국 학생들에게 질문보다 어려운 것은 대화하고 토론하고 때로는 상대방의 의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이러한 말하기는 매우 건강한 말하기이다. 그런데, 물론 세대가 많이 변하긴 하였지만, 아직도 이런 말하기 연습이 우리 학생들은 거의 되지 않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동시에 이 학생들의 어른 세대는 다른 의견을 넓은 아량으로 받아 주고, 대화를 해줄 수 있는 건강한 듣는 자세가 준비되어 있는지 의문이다. 선생님이나 직장 상사의 의견이 틀릴 수도 있는데, 이에 대해서 질문하고,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용기의 싹을 우리 문화는 아주 어릴 적부터 잘라놓는 것은 아닌가 우려된다.
상대방에 대한 진정한 배려는 전적인 수긍이 아니라, 서로 솔직하게 마음과 마음을 열고, 다른 생각들을 듣고 조율하는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화 시대에 ‘말하지 않기’ 화법은 다른 언어권 사람들에게는 배려로 이해되기 보다는 관심의 결여로 이해되어 상대방을 실망시킬 수 있다. 영국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가장 부러운 것은 이들이 누구에게든지 부담 없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며 질문하고, 때에 따라서 동의하지 않음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문화에서 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공손하지 않고 무례한 것은 아니다.
소통은 말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듣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소통이 항상 동의하는 것을 뜻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동의하지 않는 자유가 보장될 때 진정한 소통의 문화가 만들어진다. 우리 학생들에게 소통의 자유를 맛보게 해주려면, 어른 세대들이 앞장서서 이러한 열린 마음의 문화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지은 케어 옥스퍼드대 한국학ㆍ언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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