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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당신, 파이팅!

입력
2018.02.23 04:40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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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만한책방 제공
만만한책방 제공

가드를 올리고

고정순 지음

만만한책방 발행∙50쪽∙1만4,000원

표지가 말간 하늘처럼 파랗다. 누군가 오도카니 서 있다. 붉은 글러브, 등 뒤의 로프, 링 위다. 머리 위엔 구름 대신 흰색 글씨가 둥둥 떠 있다. 가, 드, 를, 올, 리, 고. 조금씩 엇갈려 쌓인 글자들이 흔들린다. 그래도 무너져 내리진 않겠다.

그는 가드를 올렸다. 가드는 복싱 선수가 상대편 주먹을 막으려 취하는 팔의 자세. 가드를 올리는 건 자신을 방어하며 공격을 준비하는 기본자세다. 이렇게 주먹을 높이 들어 얼굴을 가린 건 공격보다는 자신을 방어하려는 의도다.

책을 펼친다. 시선이 로프를 따라 링을 돈다. 그가 왼팔을 힘차게 뻗는다. 스트레이트. 이런, 상대편 주먹이 더 빨랐다. 오른팔을 날쌔게 뻗어 보지만, 퍽! 도리어 어퍼컷에 정통으로 맞았다. 상대가 연이어 주먹을 날린다. 스텝을 밟으며 빠져나가려 애쓴다. 소용없다. 계속 두들겨 맞는다. 털썩, 무릎이 꺾인다.

고정순의 그림책 ‘가드를 올리고’는 낯설다. 무려 50쪽에 이르는 이 그림책에는 사각의 링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싸움, 붉은 글러브를 낀 주인공과 검은 글러브의 난타전만이 오롯이 담겼다. 관중도 없고 심판도 보이지 않는다. 환호성도 들리지 않고 통쾌하지도 않다. 죽죽 뻗은 굵은 선과 속살을 고스란히 드러낸 투박한 종이, 짓이기듯 겹쳐진 검정과 어쩐지 핏자국 같아 보이는 빨강. 버거운 상대를 맞은 주인공은 헛되이 주먹을 휘두르고, 속절없이 두들겨 맞고, 거듭 무릎을 꿇고, 기어코 일어선다.

만만한책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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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오른다. 처음에는 단박에 오를 것 같았지.” “바위를 지나니 웅덩이, 웅덩이를 넘으니 가파른 언덕.” 단정한 푸른빛 활자에 주인공의 고단한 속내가 실렸다. 거친 호흡과 어지럽게 오가는 주먹, 무겁게 가라앉는 공기가 손에 잡힐 듯 격렬한 그림과는 명확한 대비를 이룬다. 한걸음 물러나 자신의 시합을, 자신의 삶을 관조하는 태도랄까. 글과 그림의 흥미로운 조합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격렬하고 아련하며 울림이 깊다.

또다시 쓰러진 주인공이 깊은 어둠 속에 잠겨 있다. 쓰레기처럼 내동댕이처져 있다. 지치고 힘들고 외로울 그에게, 세상 곳곳 수많은 링 위에서 용기 내어 힘겨운 싸움을 시작한 이들 모두에게 격려의 박수, 응원의 함성을 들려주고 싶다. 우리가 옆에 있다고 말하고 싶다. 아니, 우리도 모두 링 위에 있다고 말해야겠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멍들고 상처 난 얼굴로 그가 일어선다. 가드를 올린다. 싸움은 계속될 것이다.

최정선 어린이책 기획자

만만한책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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