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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민영빈 선생, 그리고 YBM

입력
2018.02.22 19:0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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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어른의 죽음은 거대한 도서관 하나가 땅에 묻히는 것과 같다. 한평생을 실천한 신념과 사회적 체험과 지혜까지 사라진다. 개인의 성취를 넘어 사회 공동체를 위해 유별나게 배려한 사람일수록 존재 자체가 젊은이들에게 롤모델이 되고 상징이 되는 사람이다. 유한한 인간조건이지만 벌써 안타깝고 그리울 뿐이다. 시사영어사 민영빈 창업주께서 향년 88세로 하느님의 부름을 받았다. 말년의 병석을 위문도 못한 죄를 고해야 하는데 꽃에 둘러싸인 영정사진은 환하게 웃고 계신다. 거인의 미소다. 질풍노도의 현대사에서 ‘영어를 경영한’ 올곧은 어른이시다. 하얀 국화꽃 밑에서 큰절을 올린다. 큰일 이루셨습니다, 편히 가십시오의 인사말도 눈물에 덮인다. 그리운 것은 그리워하며 울고 싶은데 칠십 주변의 눈물은 통곡도 어려운가 보다.

가 보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이 일 때마다 무소의 뿔처럼 옹골차게 가까운 미래를 헤쳐나간 선생은 나의 앞길을 인도하는 큰바위 얼굴이었다. 출판을 직업으로 하지 않았다면 이런 어른을 뵙지도 못했을 것이다. 문예출판 전병석 선배에 이끌려 인사를 올린 지 벌써 40년이다. 촌티 나는 후배에게 글로벌한 젠틀맨의 품격을 배워주었던 대선배의 정이 남달랐다. 선생의 칠순 기념 회고록 ‘영어강국 KOREA를 키운 3·8 따라지’를 읽은 감동을 말씀드렸을 때는 그렇게 좋아하셨다. 많이 외로우셨던 모양이다.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말처럼, 조그마한 주머니로 감싸려 해도 천성이 곧은 송곳은 삐져나올 수밖에 없다. 선생은 출판의 보자기 정도로는 감쌀 수 없는 큰 이상을 묵묵히 실천한 대인이셨기 때문이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 처음으로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대학영자신문은 1954년 선생이 영어공부에 대한 집념으로 창간한 출사표였다. 같은 피란민 신일철 교수가 편집장인 고대신문의 자매지였다. 대학친구 민재식 씨까지 출판사에 합류한 위대한 우정은 평생을 간다. 훌륭한 동반자를 품을 만한 선생의 넉넉한 그릇의 품격을 보여준다. 아버지의 별세로 10년간 몸담았던 영자신문 ‘코리아헤럴드’ 기자· 논설위원직을 팽개치고 본격적으로 시사영어사를 맡는다. 월간 ‘시사영어연구’는 우리가 세상을 보는 유일한 창이었다. 생동하는 글로벌 감각을 터득할 수 있는 재야의 고급영어 교과서였다. 그리고 ‘English 900’ 회화 테이프의 출간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오디오 영어시대를 열고 영어회화 교육의 혁명을 일으켰다. 영문법 주변만 맴돌던 벙어리 같은 제도교육이 민간출판에 의해 눈을 뜨고 말문을 열게 되었다. 수출만이 살 길이던 1970년대에 이 영어회화 테이프와 함께 ‘상업무역 실무영어대전’, ‘시사엘리트 영한사전’은 해외시장을 개척한 ‘수출전사’에게 미사일 같은 신병기였다. 지금 세계무역 10대국에 오른 신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미국이민이나 유학을 꿈꾸는 사람들은 그 다음의 수혜자였다. 우리는 스스로 공부해야 하는 의병의 사회에 살았다. 공교육이 흉내 낼 수 없는 살아있는 영어교육은 선생의 치열한 창의력과 도전정신이 이루어낸 의병정신의 총화였다. 1990년에는 선생의 필생의 꿈인 영자일간지 ‘코리아데일리’를 창간하여 고생하기도 한다. 항상 한 발자국 앞선 선생의 낙관적 창조정신은 통속한 시대를 조금 앞서기도 했다.

선생은 자신의 이름 YBM을 회사이름으로 당당하게 내세웠다. 전쟁 같은 시장 속에서도 출판을 통한 문화창달을 이루겠다는 선언이자 자신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겠다는 창의문(倡義文)이다. 한국 영어교육의 의병장으로서의 YBM 깃발은 종로2가 본산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 YBM영어학원에 휘날리고 있다. 선생은 고향 해주와 가까운 동두천 선영에 영어강국을 이룬 거인의 몸을 눕혔다. 평안하소서.

조상호 나남출판ㆍ나남수목원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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