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 냄새였다. 분명 마음에 드는 향료들을 비율에 맞춰 넣었는데, 8가지 향료를 섞은 비커에선 소주 향이 코를 찔렀다. 2시간 동안 후각 세포를 괴롭힌 결과가 소주 향이라니. 그때 조향사가 구원의 말을 날렸다. “향료에 섞인 알코올 때문에 그래요. 김치의 발효기간처럼 2주 정도 숙성 기간을 거치면 멋진 향수가 될 거예요.”
40년 가까이 향수 한 번 써본 적 없는 기자가 나만의 향수 만들기에 도전했다. 어느새 몸을 휘감기 시작한 ‘아재’ 냄새를 지우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내가 만든 향수의 이름도 ‘아재파탈’이라고 붙였다.
19일 서울 마포구 연남동의 한 향수공방에 들어서자 작은 향료병 58개가 나를 맞았다. 강혜임 조향사는 향료의 향을 맡기 전, 먼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향을 적어달라고 했다. 바다냄새ㆍ솔향기ㆍ시원한 느낌ㆍ민트향이 좋다고 썼다. 남성 스킨 냄새와 상큼한 향, 비누향은 보통, 달콤하고 진한 향은 싫다고 적었다. 이후 45분간 시향지에 향료를 찍어 하나씩 맡아보며 마음에 드는 향을 골랐다.
오기 전까지만 해도 향기를 계속 맡는다는 게 이토록 힘든 일인 줄 몰랐다. 맡을수록 코 안의 찌릿함이 심해졌다. 날카로운 삼지창으로 코 속을 쿡쿡 찌르는 느낌이랄까. 강 조향사는 “향료 속 알코올이 날라 가기 전에 향기를 맡으면 그런 느낌이 더 강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향료 고르기 끝 무렵엔 더 이상 향이 구별되지 않아 공방 밖으로 수 차례 나가야 했다. 향기를 만들러 찾아간 곳에서 ‘향기 없음이 주는 행복’을 알게 됐으니, 참 아이러니다.
향수는 향이 나는 시간에 따라 짧은 건 ‘탑 노트’, 중간은 ‘미들 노트’, 긴 건 ‘라스트 노트’로 분류된다. 개인적으로 가장 이해하기 힘든 향기는 라스트 노트에 속하는 시더우드였다. ‘습한 향. 지하실 냄새’라는 설명처럼 눅눅한 느낌이 묻어났다. 그러나 강 조향사는 “그림에 명암을 넣는 것처럼, 깊이 있는 향기를 만들기 위해 소량을 넣는 향료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힘들게 총 12개의 향료를 골랐다. 탑 노트에는 탄산ㆍ레몬ㆍ자몽 향기의 스파클링 시트러스와 블랙커런트 열매 향을 담은 카시스, 민트ㆍ아카시아ㆍ라임 향료를 선택했다. 미들 노트에는 바다처럼 시원한 느낌을 가진 씨솔트와 아쿠아, 히아신스(흙 위에 있는 풀냄새), 유칼립투스(풀 냄새) 향료를 택했다. 라스트 노트에는 가벼운 파우더 냄새의 화이트엠버와 이끼향의 모스, 부들부들한 가죽냄새인 핑크 스웨이드 향료를 찜했다.
그런 다음 30분간 라스트→미들→탑 순으로 각 향료가 묻어 있는 시향지를 겹쳐 원하는 향을 만들어갔다. 미들 노트로 고른 4가지 향료 중에선 풀 냄새가 부딪히는 거 같아 유칼립투스를 뺐다. 탑 노트에선 톡 쏘는 향을 갖고 있는 민트와 아카시아ㆍ라임 향료를 제외했다. 그렇게 남은 8개 향료가 섞인 향기는 마치, 햇볕이 잔잔하게 드는 숲 속에 앉아 하얀 거품이 이는 파도를 평화롭게 바라보는 느낌을 자아냈다. (남성 스킨 냄새가 진하게 났다는 사실은 비밀이다)
강 조향사는 스파클링 시트러스 3방울(1방울 당 0.03g), 카시스 2방울 등 8개 향료를 총 45방울 떨어트려 내가 만든 향과 가장 유사한 샘플 1을 만들어줬다. 나는 샘플 1을 기준으로 향료의 방울 수를 조절해 원하는 향은 강화하고, 다른 향은 줄이는 방식으로 샘플 2ㆍ3를 제작했다. 그리고 1~3번 샘플 중 가장 마음에 드는 향을 골랐다. 세계 유일의 ‘아재파탈’ 향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상큼ㆍ달콤하진 않지만, 어디서도 맡을 수 없는 50㎖의 아재파탈 향수는 지금 매력발산의 시간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다. 변태섭 기자 libertas@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