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코피 쏟던 허약한 아이
쇼트트랙으로 시작해 빙속 전향
작년 월드컵선 0.001초 차로 2위
모태범 잇는 다크호스로 부상
문 대통령 “참으로 장하다” 트윗
0.01초,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로 금메달을 놓쳤지만 차민규(25ㆍ동두천시청)는 마냥 즐거웠다.
그는 19일 강릉 오벌에서 열린 평창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m에서 34초42를 기록하며 노르웨이의 호바르트 로렌트젠(34초41)에 밀려 은메달을 차지했다.
간발의 차이로 우승을 놓쳐 아쉬울 법도 하지만 그는 “차민규 선수에게 0.01초 차이란?” 질문에 “짧은 다리?”라고 농담할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그는 “약간 아쉽긴 하지만 목표가 순위권에 드는 것이었고, 실제로 그렇게 돼 기분이 좋다”며 “지금은 너무 기쁘고 정신이 없어 아직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고 솔직히 말했다.
14조 아웃코스에서 레이스를 펼친 차민규는 첫 100m를 9초63에 주파했다. 초반 100m 기록은 썩 좋지 않았지만 뒷심이 위력을 발휘했다. 힘차게 얼음을 지치면서 스피드를 끌어올려 ‘깜짝 메달’의 주인공이 됐다.
그는 어린 시절 추운 겨울만 되면 유독 코피를 많이 쏟던 허약한 아이였다. 차민규의 부모는 아들을 데리고 여러 군데 병원을 돌아다녔지만 코피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결국 운동을 택했다. 안양 관양초등학교 4학년 때 그는 그렇게 스케이트화를 신었다. 시작은 쇼트트랙이었지만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유망주와 경쟁하기엔 다소 버거웠다. 그는 한국체대 진학을 앞두고 과감히 스피드스케이팅으로 종목을 바꿨다.
어린 시절의 쇼트트랙 경험은 지금도 큰 자양분이다. 곡선 주로에 강점을 보이는 그는 “아무래도 쇼트트랙에서 전향한 것이 코너워크에 도움이 된다”고 밝혔다.
차민규는 2014년 소치올림픽 국내 선발전을 앞두고 오른 발목 인대를 심하게 다치는 불운을 겪었다. 주변에선 선수 생명이 끝났다고 말할 정도로 큰 부상이었다. 그는 무너지지 않았다. 소치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선수들의 경기 모습을 TV로 지켜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는 “빨리 회복해서 스케이트 타고 싶다는 그 마음 하나로 버텼다”고 털어놨다.
부상 회복 후 파워를 늘린 차민규는 2016년을 기점으로 기량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2016년 12월 삿포로동계아시안게임 선발전에서 2010년 밴쿠버 올림픽 500m 금메달리스트 모태범(29ㆍ대한항공)을 누르고 남자부 종합우승을 차지하더니 2017년 1월엔 동계체전 남자 일반부 500m에서 대회 신기록을 쓰며 정상에 섰다. 이어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 500m 우승,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 500m 동메달 등 출전하는 국제 대회마다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평창올림픽을 불과 2개월 앞둔 지난해 12월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스피드스케이팅 월드컵 3차 대회에선 개인 최고 기록인 34초314의 기록으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당시 금메달을 차지한 월드컵 세계랭킹 2위 알렉스 보이버트 라크로익스(캐나다)와 단 0.001초 차이였다. 이 때문인지 빙속 전문가 상당수는 차민규를 이번 대회 다크호스로 꼽았다. 한국일보 해설위원인 김관규 평창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경기위원장도 평창올림픽 직전 “차민규를 주목하라. 금메달이라 장담할 수 없지만 어떤 색깔이든 메달을 목에 걸 것”이라고 예고하기도 했다.
차민규는 “4년 전에는 TV로만 보다가 직접 뛰니 처음에는 올림픽이 실감나지 않았다. 경기장에 들어와서 관중들의 함성을 들으니 진짜 올림픽이구나 싶었다”며 팬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한편, 문재인 대통령은 차민규의 은메달 소식에 직접 소감을 밝혔다. 문 대통령은 이날 자신의 트위터에서 “참으로 장하다”면서 “어려운 종목에서 기적 같은 기록이었다”고 격려했다.
강릉=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강릉=김지섭 기자 oni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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