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순항 중인 평창동계올림픽 개회에 힘입어 남북 바둑대회 추진
“평창동계올림픽의 열기가 반상(盤上)에서도 재현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했다. 과정이 쉽진 않겠지만 무르익은 분위기에서 나온 자신감으로 보였다. 현재 바둑계에 당면한 위기를 기회로 돌리려는 타개책까지 염두에 둔 듯 했다. 북한의 평창동계올림픽 참가로 조성된 남북 해빙무드와 관련, 손근기(31ㆍ5단) 한국프로바둑기사회 회장의 반상 포석은 그랬다. 사실상 스포츠로 자리매김 한 바둑을 매개로 남북 반상대결을 추진하겠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19일 서울 홍익동 한국기원에서 만난 손 회장은 취임 1개월을 맞는 소감을 묻자 세계인의 축제로 현재 진행 중인 평창동계올림픽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지난 달 22일 정기총회에서 351명의 국내 프로바둑기사회 회장에 선출됐다. 33대 회장으로 뽑힌 그는 지난 1971년 당시 28세로 5대 회장에 당선된 김인 9단에 이어 두 번째로 젊은 회장이다.
본격적인 업무는 이달 초부터 시작했다는 손 회장은 “아직까지 정신이 없다”면서도 “막상 내부를 들여다 보니, 답을 찾기 어려운 숙제가 많다”고 토로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국내 프로바둑계는 최악의 상황이란 게 일반적인 진단이다. 프로바둑기사라면 나이와 성별에 관계없이 누구나 참가 가능한 종합기전이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상황이다. 현재 종합기전은 KB바둑리그와 GS칼텍스배, KBS바둑왕전, JTBC 챌린지배 등에 불과하다. 1990년대 중반, 15개까지 열렸던 때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다. 그 나마 최근 신설됐던 한국마사회의 ‘렛츠런파크배 오픈토너먼트’(2014년)와 KT의 ‘올레배 바둑오픈 챔피언십’(2010년) 대회마저 후원사들이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직간접적으로 휘말리면서 사라졌다.
“프로바둑기사들이 마음껏 기량을 펼칠 수 있는 마당이 넓어져야 되는데, 오히려 축소되고 있는 형편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바둑에 입문하려는 꿈나무들도 점점 줄어들고 있어요. 어찌 보면 라이벌인 중국에 밀리는 것도 당연한 수순입니다. 이 상태로는 한국 바둑의 미래도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합니다.” 프로바둑기사들의 생존 자체가 위협 받고 있다는 게 손 회장의 판단이다.
손 회장은 지난 2016년 혜성처럼 등장한 구글 인공지능(AI) 바둑프로그램인 ‘알파고’ 이후 모아졌던 바둑에 대한 관심이 정작 프로기사들에게 가장 절실한 종합기전 신설로 이어지지 못했던 게 아쉽다고 했다.
“지금으로선 뭔가 특단의 대책이 필요해요. 일시적이 아닌 대중들의 이목을 계속해서 집중시켜 나갈 만한 중장기적인 프로젝트가 시급합니다.” 손 회장이 성공 궤도에 들어선 평창동계올림픽의 기운에 힘입어 남북 반상대결 추진에 나선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세계대회에 불참하면서 정확한 기력 측정은 어렵지만 약 3만여명의 바둑 인구를 가진 북한의 바둑 실력이 상당하다는 게 손 회장의 귀띔이다.
반상 외적인 환경 또한 긍정적이다. 실제 역대 어느 정권 보다 바둑 애호가들이 정치권의 핵심인사들로 구성돼 있다. 아마 4단의 고수인 문재인 대통령은 “작은 바둑 대회에서 우승한 경험을 갖고 있다”고 공공연히 밝힐 만큼 바둑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다. 문재인 정부 출범 당시 중국 특사로 선임된 이해찬 전 국무총리와 미국 특사로 임명된 홍석현 전 중앙일보 회장, 안희정 충남 도지사 등도 바둑 애호가로 유명하다.
손 회장은 또 생계 유지를 위한 프로바둑기사들의 일자리 창출 역시 시급한 과제로 꼽았다. 프로바둑기사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30대 중반 이후엔 경쟁력이 떨어지면서 기원 운영 등으로 후진 양성에 나서는 게 일반적이지만 경제적으로는 불안정한 게 현실이다.
“솔직히 맡겨진 숙제를 풀기가 쉽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바둑계 자체적인 노력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래도 동료들과 머리를 맞대고 묘수를 찾아봐야죠. 기존 정석을 파괴하면서 바둑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알파고처럼 말입니다.” 손 회장의 말에 30대 젊은 기사의 패기가 묻어났다. 허재경 기자 rick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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