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염병 관리 실패 국가 책임 첫 인정
30번 환자 국가상대 손해배상訴
“역학조사 부실” 1심 뒤집고 승소
2015년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에 감염된 환자에게 국가가 위자료를 지급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법원이 메르스 확산 사태에 대한 국가 책임을 인정한 첫 사례다.
18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항소4부(부장 송인권)는 이모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국가의 과실 정도와 메르스 치명율(致命率ㆍ40%), 원고의 치료기간(30여일) 등을 고려할 때 국가가 1,000만원과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9일 판결했다. 이는 “과실을 인정하기 어렵다”며 원고 주장을 기각한 1심 판결을 뒤집은 것이다.
2015년 5월22일 발목 수술을 받은 뒤 대전의 한 병원에 입원한 이씨는 입원 8일만에 ‘메르스 30번 환자’라는 진단을 받았다. 감염 경로를 보니 평택 성모병원에서 최초 감염자(1번 환자)로부터 감염된 2차 감염자(16번 환자)와 같은 병실을 사용한 게 원인이었다. 1번 환자와 16번 환자는 모두 4명 이상에게 메르스를 전파한 ‘슈퍼전파자’였다.
재판부는 1번에서 16번, 30번 환자로 이어진 감염 과정에서 국가 과실이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판단했다. ▲1번 환자가 삼성서울병원에서 최초 의심환자로 신고됐을 때 질병관리본부가 진단검사나 역학조사를 지연한 것과 ▲1번 환자 확진 후 그가 거쳐 간 병원들에 대한 역학조사가 부실하게 이뤄진 것 등을 판단 근거로 제시했다.
재판부는 “질병관리본부 공무원들은 의무기록지와 폐쇄회로(CCTV) 영상을 통해 최초환자가 병실 밖에서 여러 사람과 접촉한 사실을 확인하고도 같은 병실을 쓴 인물만 격리했다”며 “1번 환자에 대해 제대로 된 역학조사가 이뤄졌다면 16번 환자가 입원하기 전 감염 경로 등이 추적돼 16번 환자와 30번 환자간 접촉이 차단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선 메르스 관련 소송들에서 재판부는 정부 과실을 일부 인정하더라도 이를 환자의 감염 원인으로 보기는 무리라고 판단했다.
지난달 23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8부(부장 이원)는 메르스로 숨진 ‘38번 환자’ 오모씨 유족들이 병원과 정부, 지자체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를 기각하며 “제출된 증거만으로 공무원의 과실과 피해자의 감염 및 사망 사이에 인과관계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사망한 오씨는 이씨와 같은 병실을 쓴 환자다.
이씨와 함께 소송에 참여한 경실련은 이날 성명서를 통해 “국가의 감염병 관리 실패 책임을 인정하고 피해 국민에게 위자료 지급을 결정한 첫 판결”이라며 “감염병 예방과 관리를 위해 정부가 근본적인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환구 기자 red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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