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렸어 H.O.T’ ‘영원해요 H.O.T’. 설 연휴가 시작된 지난 15일 오후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내 올림픽홀. 지하철역 3번 출구부터 공연장까지 가는 50여m의 길목엔 이런 문구가 적힌 A4 용지가 줄을 지어 붙어 있었다. MBC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3’를 통해 17년 만에 다시 모인 ‘1세대 아이돌’ H.O.T에 팬들이 보내는 응원 메시지였다. 강타, 문희준, 장우혁, 토니안, 이재원 등 다섯 멤버가 2001년 팀 해체 후 모여 공연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아이는 남편이” 시누이와 올케도 대동단결
좋아하는 가수를 향한 팬들의 순애보엔 ‘이끼’가 끼지 않았다. ‘소녀 부대’에서 어느덧 ‘며느리 부대’가 된 팬들의 열정은 여전히 뜨거웠다.
시댁 눈치 보기에 바쁜 명절 연휴도 ‘H.O.T 며느리 부대’의 발목을 잡지 못했다. 공연장엔 올해 만으로 네 살이 된 첫째를 비롯해 두 아이를 시댁에 맡기고 온 주부 팬도 있었다. 서울 목동에서 왔다는 유(33)모씨는 “시어머니와 시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왔다”며 “시누이가 H.O.T의 열렬한 팬이기도 해 시댁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고, 시아버지가 (목동역) 지하철역까지 차로 데려다 줬다”며 웃었다. 시댁이 기독교 집안이라 설 당일 차례를 지내지 않아 음식 준비 부담이 덜한 덕도 컸다. 유씨는 공연장에 시누이인 신모씨와 왔다. 사이가 껄끄러울 수 있는 시누이와 올케는 이날 H.O.T로 대동단결했다. 두 사람은 ‘시누이’와 ‘새언니’란 문구가 적힌 검은색 마스크를 각각 나눠 쓰고 H.O.T 공연을 기다렸다. 유씨는 “표를 구하지 못했지만 공연장 밖에서 H.O.T 노랫소리라도 들으려고 왔다”며 “집에 갈 때는 남편이 공연장으로 데리러 오기로 했다”고 말했다.
모든 며느리가 유씨 같은 ‘시댁 낭만’을 기대할 수는 없는 법. 공연장에서 만난 네 명의 기혼 여성 팬들은 시댁에 말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왔고, 설 당일 시댁을 찾을 예정이라고 했다. “시댁에서 차례를 지내지 않아” 짬을 낼 수 있었던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경북 포항시에서 올라왔다는 장(34)모씨는 “두 아이는 남편이 보고 있다”며 “17년 만의 H.O.T 공연이고 결혼 후에 처음으로 공연장에 오는 거라 남편이 이해해줬다”며 쑥스럽게 웃었다.
이날 공연장에는 부산 등 각 지역을 비롯해 중국 등에서 온 해외 팬도 적지 않았다. 공연 입장권을 구하지 못했지만, 현장에서 나올 표를 기대하며 공연장 주변에서 밤을 새운 열혈팬도 있었다. 대구에서 왔다는 정(34)모씨는 지난 14일 오후 4시부터 이튿날까지 공연장 주변을 맴돌았다. 정 씨는 “혹여 표를 구할 수 있을까 싶어 왔다”며 “잠은 차에서 잤다”고 말했다.
‘캔디’ 복장하고 S.E.S처럼… 20여 년 된 우비까지
공연장엔 시간이 거꾸로 흘렀다. 일부 팬들은 H.O.T와 S.E.S의 1990년대 후반 무대 의상처럼 옷을 맞춰 입고 왔다. 1990년대 패션 스타일을 잘 재현한 팬 중 현장 추첨으로 특별석을 제공한다는 ‘무한도전’ 제작진의 공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많이 눈에 띄었던 복고 의상은 털 바지와 장갑 등을 한 H.O.T의 ‘캔디’ 무대 의상이었다. 앞머리를 살짝 부풀리고 뒷머리를 털 방울 머리끈으로 묶은 스타일로 공연장을 찾은 여성 관객도 많았다. 바다가 S.E.S 초창기 활동을 할 때 했던 모습이다. 교복을 입고 온 관객도 있었다.
추억의 아이돌 소품도 여럿 등장했다. 한 여성 관객은 흰색(H.O.T 상징색) 우비를 입고 맨 가방에 안칠현(강타) 등 다섯 멤버들의 본명이 적힌 오색의 이름표를 달고 추억을 공유했다. H.O.T가 1990년대 후반 SBS 예능프로그램 ‘가쁜 우리 토요일’에 나왔던 영상 등을 녹화한 비디오테이프와 그룹 4집 ‘아이야!’(1999) 활동 시절 제작된 우비를 20년 가량 만에 다시 꺼내 들고 온 관객도 있었다. “2001년 2월 27일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연 마지막 공연 후 6,198일을 기다렸어요. 다음엔 꼭 단독 공연을 했으면 좋겠어요.” (권모씨ㆍ35)
‘전사의 후예’ 춘 ‘불혹 그룹’의 눈물
“다 함께 손을 잡아요.~” 2,500여 팬들은 공연 시작 전 H.O.T 3집 ‘리서렉션’ 수록곡 ‘빛’을 함께 부르며 열기를 돋웠다.
공연장은 흰색 물결로 가득 찼다. 관객들은 ‘하나라는 아름다운 느낌’이란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H.O.T의 합동 무대를 응원했다. H.O.T는 데뷔 곡 ‘전사의 후예’로 공연의 문을 열었다. 각 잡힌 군무는 여전했다. H.O.T는 ‘캔디’를 비롯해 ‘행복’ ‘위 아 더 퓨처’ 등 10여 개의 히트곡을 쏟아냈다. 오후 7시 30분부터 10시까지 이어진 공연 내내 관객의 ‘떼창’은 계속됐다. 토니는 “흰 물결을 보는 것 자체가 믿기지 않는다”며 벅차했고, 다섯 멤버들은 결국 눈물을 흘렸다. 특히 팀의 막내인 이재원이 공연 내내 눈물을 참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이들의 합동 공연 관련 모습은 17일 오후 10시 25분에 첫 방송된다.
H.O.T가 17년 만에 모여 합동 무대를 팬들의 호응 속에 펼쳤지만, 이들의 향후 활동은 불투명하다. H.O.T 관계자들에 따르면 팀의 신곡 발표 및 단독 공연 계획은 정해진 게 없다. 다섯 멤버의 음악적 방향이 서로 다른 데다, 멤버별 소속사의 이해관계가 엇갈려 팀 활동 조율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H.O.T는 2016년 다섯 멤버가 모두 모여 데뷔 20주년 기념 공연 등을 논의했으나 서로 견해차를 좁히지 못해 실행하지 못했다.
글ㆍ사진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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