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부모, 명절 손주 돌보기 부담에
자녀들 귀경 권하는 경우 늘어
스스로 여가 중요성 깨달으며
자녀 세대들 여가 역시 배려

충남 당진에 사는 이호석(75)씨는 명절 귀성 자녀에게 “웬만하면 빨리 집이나 처가로 가라”고 수년째 권한다. 이씨는 14일 “평소 아내와 단둘이 사는 터라 슬하의 3남2녀가 자녀들까지 데리고 오면 북적북적 정을 나누는 즐거움이 크지만, 오래 잡아둬 봐야 서로 짐이 된다는 생각에 예전처럼 한시라도 더 붙잡고 싶진 않다”고 했다. 부산 해운대구 박영숙(59)씨는 “처음엔 빈말로 ‘빨리 가라’ 재촉하고 아들 딸 가족도 마지못해 갔는데, 막상 정착이 되니 명절 심신의 피로도 적고 친구들도 만나는 등 장점이 더 많다”고 귀띔했다.
명절 아이를 데리고 고향을 찾는 자녀에게 이른 귀경을 권하는 노부모가 늘고 있다. 1년에 잘해야 한두 번 얼굴 맞대는 자손들을 하룻밤 더 재우거나 한끼라도 더 먹여 보내고 싶은 부모 마음은 한결같다. 다만,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서로 피로가 쌓이니 아쉽더라도 일찍 보내주는 게 ‘누이(부모) 좋고 매부(자식) 좋다’는 식으로 바뀌는 분위기다.
일부 노부모는 자녀를 빨리 돌려보내려는 이유로 ‘명절 손주 돌봄’ 고충을 꼽는다. 아이 식사 놀이 취침 기준을 까다롭게 요구하고 외출한 뒤 하나라도 어긋나면 서슴없이 잔소리하는 자녀에게 “빨리 가라”고 한다는 것이다. 강모(67)씨는 “육아 스트레스에서 잠시 벗어나 명절 고향 친구들을 만나고픈 자녀들 마음은 이해하지만, (손주 돌봄에) 최선을 다했음에도 타박하면 기운이 빠지고 섭섭함이 몰려오는 게 사실”이라고 했다.

심지어 ▦음식물 오물오물 씹어 먹이기 ▦주방용 행주로 얼굴과 입 닦아주기 ▦욕설 받아쓰기 시키기 등 ‘명절 손주 안 보기 3가지 방법’이 설을 앞둔 경로당이나 찻집에서 농담처럼 구전된다고 한다. 손주 돌보는 조부모 절반 이상(59.4%)이 “체력적으로 힘들다”고 답할 만큼(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설문), ‘오면 반갑고, 가면 더 고마운 게 손주’란 말이 점차 현실이 되는 모습이다.
일하는 노인들이 늘면서 명절만이라도 자신만의 휴식을 누리고 싶다는 욕구도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달라지게 하고 있다. 이삼식 한양대 고령사회연구원장은 “과거 노년층은 자녀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뒀지만, 이젠 본인의 여가나 사회생활을 충분히 누리는 추세”라면서 “스스로 여가 존중의 필요성을 깨달아가면서, 자녀 세대의 여가 역시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설령 일찍 보냈더라도 가족을 볼 기회가 적었던 과거와 달리 통신 발달로 사진이나 동영상, 영상통화 등을 통해 매일같이 자녀와 손주들 안부를 확인할 수 있는 시대다.
이호선 노인정책연구센터장은 “맞벌이 생활로 가사에 서툰 젊은 부부들이 부모에게 제사음식 마련, 아이 돌봄 등 명절 가사 노동을 의존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며 “노인들에게도 ‘명절 스트레스’가 분명 존재하는 만큼 자녀들의 배려도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형준 기자 mediabo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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