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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사법 불신

입력
2018.02.14 19:0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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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항소심 판결 후폭풍이 거세다. 판결 직후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재판부 감사 등을 촉구하는 청원이 쏟아졌다. 관련 청원이 사흘 만에 답변 기준인 20만명 동의를 넘어선 것도 이례적이다. 리얼미터가 지난 7일 500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이번 판결에 “공감하지 않는다”가 58.9%, “공감한다”가 35.7%였다. 전ㆍ현직 판사들 중에서도 판결을 비판하는 사례가 나오는 가운데 1심 재판을 맡았던 부장판사까지 갑자기 사표를 내 이런 분위기를 부채질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사법 불신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2014년 기준 사법제도 국민 신뢰도에서 한국은 27%로 조사 대상 42개국 가운데 39위였다. 판사를 향해 석궁 맞아도 시원치 않을 “쓰레기”라는 극단적 비난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하지만 미국의 독립법인인 세계사법정의프로젝트(WJP)가 평가한 한국의 법치 실태를 보면 그 정도는 아니다. 이 단체가 간행한 ‘법치 지수 2017~2018’에 따르면 한국의 전체 사법 정의는 조사 대상 113개국 가운데 20위다. 세부 평가 항목 중 민사ㆍ형사재판의 공정성은 각각 15위, 17위로 전체 순위보다 높았다.

▦사법의 실상과 거리가 있는 과도한 불신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사법제도 자체의 문제도 있겠지만 더 큰 원인은 그 제도를 잘못 운용해 온 역사에 있다. 최근 대법원이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선거법 위반 사건 재판 동향을 파악해 청와대에 알려 준 사실이 드러났다. 어안이 벙벙해진 시민을 향해 대법관들은 성명까지 내 ‘우린 잘못 없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아무도 넘보지 말라’는 사법의 성역화가 사법 불신에 군불을 때는 형국이다.

▦사법개혁 작업이 여러 갈래로 진행 중이다. 국회는 개헌특위를 구성해 사법평의회 도입 등 사법 행정 개선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상명하복식 사법행정을 깨기 위해 판사회의에서 법원장을 임명하자는 법안도 발의됐고, 대법원도 사법혁신위를 꾸렸다. 법원의 전관예우 근절, 관료적 사법행정 타파가 당면 목표다. 이 작업들이 한걸음 더 나아가 사법을 시민의 감시와 통제가 작동하는 열린 공간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기를 기대한다. 사법이 ‘당신들의 천국’에서 벗어나 시민에 다가설수록 사법 실상과 인식 사이의 간극도 좁혀질 것 같다.

김범수 논설위원 bs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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