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근대 일본의 막을 연 메이지(明治)유신 150주년이다. 1850년대 중반부터 1870년대 중반까지 전개된 메이지유신은 지방분권적 봉건국가를 무너뜨리고 중앙집권적 천황제 국가를 수립하는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의 혁명운동이었다. 그 핵심은 부국강병(富國强兵)과 식산흥업(殖産興業), 서양화와 자립화였다. 곧 서양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강력한 군대와 부유한 경제를 갖춘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1868년 1월 3일 국가권력의 주체를 장군에서 천황으로, 10월 23일 새 시대의 원호(元號)를 게이오(慶應)에서 메이지(明治)로 바꾼 것이 큰 전환점이었다.
아시아 대륙과 한 뼘 바다로 격리된 작은 섬나라 일본에서 일어난 메이지유신은 일본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와 세계의 판세를 바꿔놓는 결과를 초래했다. 따라서 메이지유신은 한국과 중국에도 각별한 의미를 지녔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에 성공해 근대화를 이룩한 반면, 한국은 개화운동에 실패해 열강의 패권싸움에 휘둘렸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에 철저해 근대국가로 탈바꿈한 반면, 중국은 양무운동(洋務運動)에 미진해 왕조국가에 머물렀다. 일본은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고 청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동아시아의 패자로 올라섰다. 결국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중국은 열강의 반 식민지로 전락했다. 그러므로 메이지유신은 일본ㆍ한국ㆍ중국이 다른 처지로 나아가는 삼극분해(三極分解)의 출발이었다.
메이지유신은 세계 역사에서 가장 효율적인 근대화 혁명이었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이 100만 명 이상을 희생하고도 반동체제로 돌아간 것에 비해, 메이지유신은 3만 명 정도의 희생으로 국가 전체를 철저히 바꿔놓았다. 이런 효율성과 철저성 때문에 메이지유신은 국가를 개조하려는 한국의 혁명가가 흉내 내고 싶은 모델이기도 했다. 김옥균의 갑신정변, 박정희의 5ㆍ16쿠데타가 그 예다.
그렇지만 메이지유신은 일본은 물론 아시아와 세계에 아주 나쁜 상처를 입혔다. 일본은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국병합’,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으로 매진해 수많은 나라의 주권을 유린하고, 수천 만명을 살상했다. 그것은 메이지유신 과정에서 자행한 음모와 암살, 폭력과 학살 등이 국경을 넘어 더욱 잔인하고 광범위하게 확대된 현상이었다. 아울러 천황의 종교적 권위를 부활시켜 신사(神社)를 국가의 성역으로 재편하고, 모든 사람을 천황의 신민으로 교화시킨 국가신도주의의 해악이었다. 그것을 추진한 핵심세력이 바로 메이지유신의 주역인 사쓰마(薩摩ㆍ가고시마현)와 조슈(長州ㆍ야마구치현) 출신자였다. 특히 한국을 침략하고 지배하는데 앞장 선 세력은 조슈군벌(長州軍閥)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메이지유신을 기념하는 절목마다 일본의 총리대신은 조슈 출신이었다. 1918년 50주년 때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義ㆍ초대 조선총독 역임), 1968년 100주년 때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ㆍ아베 신조 총리의 외 작은할아버지), 2018년 150주년 때 아베 신조(安倍晉三ㆍA급 전범으로 잡혔다가 풀려난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총리의 외손자)가 그들이다. 메이지유신의 승리자들은 ‘천황파=관군(官軍)=개명파=정의’라는 역사관을 만들어 국민에게 확고히 정착시켰다.
아베 정권은 미국의 페리 함대가 일본에 몰려 온 막부 말기와 중국의 공선(公船)이 센카쿠열도를 위협하고 북한이 일본 상공에 미사일을 쏴대는 현재가 닮아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런 국난을 극복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평화헌법을 개정하는 제2의 유신을 꾀한다. 마침 지난 11일은 메이지유신 100주년을 기념해 1967년부터 시행해온 이른바 건국기념일이었다. 찬성파인 ‘일본의 건국을 축하하는 모임’은 조상이 이룩한 영광의 역사를 생각하며 일본의 재생을 위해 헌법 개정의 비원(悲願)을 실현하자고 외쳤다. 이에 대해 반대파인 ‘포럼 평화ㆍ인권ㆍ환경’은 메이지라는 카리스마에 기대어 천황을 원수로 규정하려는 헌법개정을 우려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렇지만 사쓰마와 조슈가 지어낸 승리사관에 물들어 전자의 목소리가 후자보다 훨씬 크게 들리는 게 메이지유신 150년을 맞는 일본의 현실이다.
정재정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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