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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범죄 ‘합의’ 감형… 망자는 두 번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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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범죄 ‘합의’ 감형… 망자는 두 번 운다

입력
2018.02.13 04:40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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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자친구 심하게 때려 죽게 했지만 

 유족과 9000만원에 합의 집행유예 

 망자가 동의 안 한 ‘합의’로 감형 

 #2 

 동거녀 살해 시멘트 암매장 40대 

 피해자 다섯살 때 버린 아버지가 

 수천만원 받고 합의해줘 고작 3년형 


‘저항하지 않는 피해자를 상대로 양손으로 머리채를 붙잡아 머리카락이 뭉치째 빠질 정도로 강하게 수회 흔든 후 양 손바닥과 양 주먹으로 피해자의 얼굴과 머리 등을 10회 이상 때려….’

지난해 사망 당시 46세였던 정은비(가명)씨의 사망 원인은 판결문에 이렇게 기록돼 있다. 가해자인 은비씨의 남자친구 이모(40)씨가 얼마나 잔혹하게 범죄를 저질렀는지 보여준다. 그러나 판결문의 결론은 ‘징역 3년에 처한다, 다만 4년간 위 형의 집행을 유예한다’였다. 이씨는 풀려났다. 이씨가 유족(은비씨 부모와 자매)에게 합의금으로 9,000만원을 지급했고, 유족이 처벌을 원하지 않는 점이 상해치사 가해자를 이토록 간단히 풀어준 주요 이유였다.

잔혹한 사망범죄의 형량마저 돈으로 흥정이 돼야 하는 걸까. 상해ㆍ폭행치사 사건조차 유족 합의를 내세워, 지극히 낮은 형량이 선고되는 경우가 많아 비판이 거세다. 억울하게 맞아 죽어 입을 열 수 없게 된 은비씨는 가해자를 용서한 적이 없건만, 금전이 오간 유가족의 합의가 터무니없는 선고를 이끌어내는 현실. 합의를 특별양형인자로 취급하는 대법원 양형위원회 가이드라인으로 빚어지는 부조리극이다.

 망자가 동의하지 않은 ‘합의’로 석방 

은비씨 사건도 검찰의 구형은 무려 징역 15년이었다. 지난달 11일 집행유예라는 결론을 내놓은 의정부지법 형사합의11부(부장 고충정)는 판결문에서 특별감경인자로 유족의 처벌불원을 들었다. 피해자의 사망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중대한 결과가 발생했음에도, 이씨가 유족에게 9,000만원을 지급하고 유족이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서면 탄원서를 낸 것이 주효했다. 여기에 범행 이후 이씨가 119에 스스로 신고하고 범행을 자백했으며 반성하고 초범인 점도 유리한 점으로 기록됐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상해치사 사건에 집행유예가 선고된 것은 이례적이라는 반응이 크다. 사건을 조사한 남양주경찰서 관계자는 “과실치사라면 합의가 가능한데, 상해치사에다 고의적인 범죄에 집행유예 선고는 형이 낮긴 하다”고 말했다. 경찰은 “유족도 집행유예가 나와서 당황스럽고 의아해한다”고 전했다.

사건은 지난해 7월 발생했다. 경기 남양주시에서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는 이씨는 5년째 사귀어 온 은비씨가 다른 남자와 1년 넘게 교제해 온 사실을 알게 됐고, 자신이 일하던 사무실로 여자친구를 불러냈다. 이씨는 다른 남자와의 교제 사실을 다그치다 여자친구를 폭행했다. 은비씨는 외상성 뇌부종, 외상성 경막하출혈, 늑골다발골절, 외상성 기흉 등의 상해를 입고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당황한 이씨가 119를 불렀으나 은비씨는 다시 의식을 찾지 못하고 열흘이 지난 후 8월 7일 서울 중랑구 녹색병원 중환자실에서 사망했다.

은비씨는 뚜렷한 직업이 없었으며 전 남편과 사이에서 낳은 두 10대 자녀를 기르고 있었다. 아이들은 졸지에 엄마를 잃었다. 이씨가 은비씨에게 매달 300만원의 생활비를 줬고, 은비씨가 바람을 피웠다고 하나 범죄를 정당화할 수 없다. 더구나 목격자가 없는 사망범죄에서 가해자는 진술을 최대한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하기 마련인데, 이는 그대로 법원에서 채택되는 경우가 많다. 한국여성변호사회 배수진 변호사는 “이런 사건의 경우 가해자가 피해자를 한 번만 때린 게 아니라 상당 기간 폭행해 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합의를 감경요소로 볼 것이 아니라, 합의를 하지 않을 경우 가중요소로 둬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피해자 버린 부모의 합의도 합의다(?) 

사망한 피해자를 대신해 유족에게 부여되는 ‘용서의 재량’은 과연 타당할까. 더구나 유족이 피해자를 버린 부모라면. 또 다른 범죄 피해자인 이희영(가명)씨가 살다간 36년의 짧은 인생에서 그를 위해 애통해한 사람은 길러 준 할머니, 그리고 희영씨가 암매장당한 후 그의 뼈를 찾아냈던 형사들이 전부가 아니었을까 싶다. 희영씨를 폭행해 죽이고 시멘트를 발라 암매장한 동거남 이모(40)씨는 징역 3년을 받아, 이제 출소까지 2년도 채 남지 않았다. 어린 시절 희영씨를 버렸던 아버지는 이씨와 합의해주고 수천만원을 챙겼다고 한다. 판사는 이 값싼 합의를 근거로 이씨의 형을 대폭 깎아준 셈이 됐다.

희영씨는 다섯 살에 부모에게 버림받았다. 부모는 이혼해 제각각 가정을 꾸려 떠났고, 홀로 남겨진 희영씨는 돌봐주던 할머니마저 돌아가시자 보육원에서 자라야 했다. 보육원을 나온 후에는 이곳저곳 술집을 떠돌았다. 충북 음성군의 한 주점에서 일하던 그가 사라진 건 2012년 9월. 동거남 이씨는 “(동거녀가) 휴대폰만 들고 집을 나가버렸다”며 찾는 시늉만 했다. 희영씨는 그해 봄부터 술집 차량 운전을 하던 이씨를 사귀다 함께 살던 중이었다. 주점 종업원을 전전한 인생 내내 친구도 없었다. 주점에서는 좋을 것도 없는 과거 이야기를 하지도 않고, 본명을 말하지도 않는다. 갑자기 누가 사라져도 그러려니 한다. 그렇게 희영씨는 잊힌 듯했다.

청주 상당경찰서가 ‘주점 여성이 살해된 것 같다’는 첩보를 입수한 때는 지난 2016년. 희영씨가 자취를 감춘 뒤 4년이 지나서였다. 경찰은 부랴부랴 희영씨의 휴대폰, 신용카드, 통장 등을 사용한 흔적, 이른바 ‘생활반응’을 찾아 나섰다. 전혀 없었다. 수사에 나섰던 상당경찰서 관계자는 “살아 있으면 생활반응이 있을 수밖에 없다”라며 “실종자가 죽었구나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고 했다. 동거남이었던 이씨가 용의 선상에 올랐다. 그는 딱 잡아뗐다. 경찰은 살인 후 암매장이라는 의심을 갖고, 사체 찾기에 매진했다. 범인은 아는 곳에 매장한다는 심리를 토대로, 이씨의 어머니가 경작하던 밭을 유력하게 봤다. 굴착기로 밭을 한참 파헤쳐가던 중, 시멘트 뜯기는 소리가 나더니 사람의 다리뼈가 툭 튀어 올라왔다. 경찰 관계자는 “마치 ‘나 여기 있어요’하는 것 같았다”라며 “그때 사체를 못 찾았으면 이 사건은 ‘꽝’ 났을 것”이라고 전했다. 사체는 파란색 플라스틱 대형 쓰레기통에 담겼고, 시멘트로 덮여 있었다. 이씨는 범행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암매장을 도운 이씨의 동생도 붙잡혔다.

경찰은 이 사건을 고의적 살인으로 봤다. 하지만 희영씨의 뼈는 풀뿌리가 들어찰 정도로 삭아 살인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이씨는 희영씨가 주점 손님을 멋있다고 해서 다퉜다, 얼굴을 4번 때렸더니 사망했다, 시멘트도 그냥 옆에 있어서 뿌렸다고 털어놨을 뿐이다. 결국 경찰은 이씨의 주장을 뒤엎지 못해, 살인죄가 아닌 폭행치사ㆍ사체은닉죄를 적용했다. 살인죄는 형량이 훨씬 높다. 경찰 관계자는 “정상적인 가족이 있어서 즉시 실종신고를 해 사체를 빨리 찾았다면 살인 여부를 밝힐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시멘트로 시신 덮어도 고작 징역 3년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징역 3년이 선고될 줄은 몰랐다. 1심에서 5년이 나오더니, 항소심이던 대전고법 청주제1형사부(당시 부장 이승한)에서 징역 3년이 선고됐던 지난해 6월 1일. 이 사건을 파헤쳤던 상당경찰서 강력3팀 전원은 재판정에 있었다. 중요한 사건은 형사들도 재판을 챙긴다. 법정을 나서는데 욕설이 절로 나왔다. “씨X, 사람 죽여놓고 묻어도 3년 살고 나오네.” “인생 더럽다.” 이날 저녁 형사들은 모두 술을 마셨다. 희영씨의 아버지는 항소심 재판부에 이씨와 합의서를 제출했고, 합의금으로 5,000만~6,000만원을 받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씨의 변호인은 “합의서에 금액이 안 나와 있어서 나도 얼마인지 모른다”고 했다. 형량 불복으로는 대법원 상고를 할 수 없어 이 판결은 그대로 확정됐다.

“1년에 한 번 정도 희영씨가 아버지에게 전화했고, 그 아버지는 우리가 연락해서 실종신고 해달라고 하기 전에는 4년간 딸을 찾지도 않았어요. 아버지 진술서가 있으니 재판부도 제대로 기록을 봤다면 알았을 겁니다.” 경찰 관계자는 생전 희영씨를 외면했던 아버지가 사실상 목숨값을 챙기고 사체를 시멘트로 덮어버린 가해자가 혜택을 보도록 한 시스템에 분노한 듯했다.

희영씨는 아버지 집에 과일 상자를 보낸 적이 있는데 이마저도 보내지 말라는 답을 들었다고 한다. 희영씨 생모는 경찰과의 접촉도 거부했다. 희영씨는 고양이를 10마리가량 키웠다. 경찰은 “외로워서”라고 해석했다. 경찰 관계자는 “참 불쌍해요”라며 “아버지와의 합의가 피해자와 합의라고 할 수 있나”라고 되물었다.

남양주=박소영 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청주=이진희 기자 rive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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