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은 도저히 이해도 안 되고 용서도 안 됩니다. 변호사님. 가장 강력한 방법으로 응징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하루에도 서너 차례 진행되는 회의에서 의뢰인들은 격한 감정에 휩싸여 억울함을 토로하고 상대방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을 주문한다.
대부분의 법률분쟁은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 또는 계약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은 사이에서 발생한다.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 고른 상대방과 계약을 체결했음에도 의견이 대립하다 급기야 소송에까지 이른다.
저녁 7시 영화를 예매했는데, 차가 막혀 부득이 저녁 7시 40분에 영화관에 들어갔다. 이야기는 한참 진행 중. 주인공은 상대방에게 욕을 퍼붓고 폭행을 가한다. 처음부터 감상하던 관객들은 영화에 몰입하고 있으나 영화관에 늦게 도착한 나는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눈만 멀뚱멀뚱 뜨고 상황을 이해하려 노력할 뿐이다. 의뢰인을 처음 만나는 변호사는 이처럼 영화 상영 중간에 영화관에 들어간 관객과 비슷하다. 의뢰인이 비난하는 상대방은 불과 얼마 전까지 의뢰인과 같이 일을 도모하거나 흉금을 털어놓는 각별한 사이였다.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변호사라면 의뢰인을 진정시키고, 자신이 미처 못 본 앞부분을 최대한 충실히 들어야 한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에만 사로잡혀 그 상황이 발생한 원인이 있음을 잊어버린다. 변호사는 그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질문을 던진다.
“처음에 그 분과 어떤 계기로 이 일을 같이 하게 되셨나요?” “언제부터 그 분과 삐걱거리게 된 것 같은가요?” “상대방으로부터 이상한 조짐을 느낀 것은 언제부터인가요?”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볼 때, 상대방 행동에 이해되는 부분은 없는지요?” “‘지금이라도 그 분과 이 문제를 법적으로 말고 대화로 풀 생각은 없으신지요?”
의뢰인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과거를 회상하며 스토리를 풀어낸다. 이는 법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 이야기다. 나는 이 과정을 ‘흥부가 완창(完唱)’이라 한다. 의뢰인이 흥부가를 완창하는 동안 내가 하는 일은 “얼쑤”, “저런”, “그렇지!” 같은 추임새를 넣는 일이다. 판소리 흥부가를 제대로 완창하려면 보통 3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모든 사건 상담이 3시간씩 걸리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한 시간 반 이상은 들어야 의뢰인과 상대방 사이 그 동안 일어났던 일들, 감정의 기복, 다양한 역학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이 과정을 통해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소득은 의뢰인 스스로 사건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는 점이다. 세세한 이야기까지 설명하는 과정에서 ‘아... 저 사람이 이 대목에서 마음을 다친 건가?’라는 자기직면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의뢰인이 자기직면을 하면 사건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며, 이 때부터는 한 차원 높은 수준의 문제해결도 가능해 진다.
며칠 전 서울지방변호사회에서 탁상시계를 보내왔다. ‘개업 20주년 기념’이라는 문구와 함께. 1997년 2월에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으니 만으로 딱 20년. 좌충우돌 혈기 방자한 청년 변호사가 이제는 머리 희끗희끗한 중년 변호사로 변했다. 나이에 걸맞은 노련미도 장착되었을려나.
여전히 분쟁의 한 복판에서 의뢰인들을 상대하는 일은 어렵다. 하지만 내가 직접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의뢰인이 응어리진 마음을 담은 판소리 한마당을 완창할 수 있도록 북을 치고 추임새를 넣으며 도와주는 일은 경청하는 자세와 공감하는 마음만 있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나는 오늘도 튼실한 북 하나 준비해 두고 의뢰인을 맞는다. 의뢰인의 완창을 돕는 충실한 고수(鼓手)가 될 것이기에.
조우성 변호사ㆍ기업분쟁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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