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평양을 방문해 달라고 공식 초청하면서 남북 정상회담이 한반도 정세의 분수령으로 등장했다. 김 위원장이 신년사에 이어 북한 대표단의 평창 올림픽 참가와 정상회담 제안까지 남북 화해 무드가 빛의 속도로 전개되고 있어 어지러울 정도다. 다만 북핵 문제를 둘러싼 한반도 정세는 여전히 엄혹하다. 북핵 문제 해결 없는 남북관계 개선은 의미가 없다는 점에서 정상회담에 대한 들뜬 기대보다 차분하고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남북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하고 한반도 평화정착을 촉진할 수 있는 정상회담을 환영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김 위원장의 특사로 밝혀진 김여정이 10일 청와대 접견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빠른 시일 내에 평양에서 뵀으면 좋겠다”고 밝힌 점에 비춰 일각에서는 8월 15일 광복절 등의 일정까지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앞으로 여건을 만들어 성사시켜 나가자”고 신중히 답변했다. 여건의 핵심은 당연히 북핵 문제다. 문 대통령은 앞서 신년 기자회견에서도 “남북관계가 개선되기 위해서는 북핵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고 분명히 밝혔다.
문 대통령의 판단처럼 남북 정상회담의 여건이 녹록하지 않다. 앞선 두 차례 정상회담과 비견할 일이 아니다. 만남 자체가 의미였던 2000년 1차 정상회담은 북한이 아직 핵무기 개발에 진입하기 전이었으며 남북 평화·경협의 로드맵이 나온 2007년 2차 회담은 북핵 6자 회담의 국제공조 틀이 가동될 때였다. 지금은 북한의 핵무기가 미국 본토를 위협하고 국제사회의 공조는 대북압박 및 제제의 틀로 바뀐 상황이다.
특히 미국이 북한의 비핵화를 조건으로 최대 제재와 압박을 거두지 않으면서 한반도 정세의 최대 변수가 되고 있다. 평창 올림픽에 참가했던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외교 결례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북한 대표단을 외면한 뒤 출국하는 바람에 상황은 더욱 꼬였다. 남북화해 무드를 북미대화로 연결시켜 북핵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자 했던 정부로서는 상당히 곤혹스러운 처지다.
미국과 북한의 전향적 자세가 한결 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우회해서는 북핵 문제는 물론이고 남북관계, 정상회담 모두 돌파구를 찾을 수 없다. 미국과 긴밀한 협의와 소통이 없었다면 북한 대표단의 평창올림픽 참가 과정에서 불거졌던 숱한 논란은 극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문 대통령이 김여정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남북관계 발전을 위해서도 북미 간 조기 대화가 필요하다”며 “미국과 대화에 북쪽이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 달라”고 주문한 것도 대미 대화 자세가 남북 정상회담의 선행조건임을 강조한 것이다.
정부는 향후 정상회담을 향한 여정에서도 미국과 긴밀하고 유연하게 소통하며 북한을 적절히 견인하는 중재외교의 원칙을 유지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대북 압박과 제재의 목표가 대화를 통한 북핵의 평화적 해결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북한 또한 남북관계 개선이 비핵화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지 않는 이상 미국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정상회담의 문이 열리기도 전에 미국이 문을 닫아버릴 수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
문 대통령이 지금까지 북미 사이에서 벌인 중재외교 노력은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올림픽이 끝나고 나면 한미연합훈련 재개를 시작으로 시련의 시간이 닥쳐올 게 분명하다. 미일의 군사훈련 조기 재개 압박이 가중되고 있는 가운데 북한의 강력한 반발도 예상된다. 한반도 정세가 올림픽 이전의 전쟁 위기 상황으로 치닫지 않도록 한미 간에 훈련 시기와 강도를 조절하는 등 지혜를 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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