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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아그네스 소렐(2.9)

입력
2018.02.09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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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7세의 연인 아그네스 소렐이 1450년 2월 9일 숨졌다. 그를 모델로 한 화가 장 푸케의 그림 '성모'.
샤를 7세의 연인 아그네스 소렐이 1450년 2월 9일 숨졌다. 그를 모델로 한 화가 장 푸케의 그림 '성모'.

프랑스 국왕 샤를 7세(1422~1461 재위)는 영국과의 100년 전쟁(1337~1453)을 종식시키고 상비군 제도를 도입, 중앙집권적 전제 왕권의 기틀을 다진 ‘승리왕’이라 불린다. 하지만 그의 정치ㆍ군사적 성공에는 ‘오를레앙의 성녀’ 잔 다르크(1412~1431)와 그의 연인 아그네스 소렐(Agnes Sorel, 1422?~1450.2.9)의 공이 컸다.

그는 부왕 샤를 6세로부터 왕권과 함께 패색 짙은 전쟁을 물려받았다. 왕비인 마리 당주의 친정 시칠리아 왕가의 지원이 있었지만 오랜 전쟁으로 프랑스의 재정과 군사력은 말이 아니었다. 즉위식조차 치르지 못한 채 오를레앙의 전장에 머물던 그를 구원한 게 잔 다르크였다. 잔 다르크는 구원군을 모아 포위돼 있던 왕을 구출하고 즉위식을 치를 수 있게 했고, 잇단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전세를 역전시켰다.

숨을 돌린 샤를 7세가 잉글랜드와의 휴전 협상을 시작하면서 잔 다르크는 눈엣가시가 됐다. 잔 다르크는 항복을 받을 때까지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고군분투하던 잔 다르크는 1430년 오를레앙에서 포로가 됐고, 샤를 7세는 잉글랜드 측이 제안한 석방 협상을 몸값이 비싸다며 거부했다. 잔 다르크는 이듬해 5월 잉글랜드로 끌려가 화형 당했다.

샤를 7세가 아그네스 소렐을 만난 건 소렐이 20세이던 1442년 한 연회장에서였다고 한다. 군인의 딸로 시칠리 왕가의 시녀로 일하던 소렐에게 반한 왕은 곧장 프랑스 왕가로 데려와 첩으로 삼았다. 그는 소렐에게 잔 다르크와 처음 대면했던 로슈성(Chateau de Loches)을 하사했고, 영주와 신하들에게도 왕비에 준하는 의전을 요구하며 ‘왕의 여자’로 대하도록 했다. 둘은 딸 셋을 낳았다.

군인의 딸답게, 소렐은 전쟁을 기피하는 왕의 등을 떠밀어 잉글랜드와의 전쟁을 매듭짓도록 독려, 전쟁 막판 크레시 전투 칼레 전투 등의 승리로 프랑스가 우위를 점하도록 했다. 넷째를 임신한 만삭의 소렐은 전장의 남편을 응원하기 위해 1450년 쥐미에주(Jumieges)에 들렀다가,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사인은 이질로 알려졌으나, 2005년 감식 결과 수은중독으로 판명됐다. 화장품 원료 혹은 살충제로 수은이 흔히 쓰이던 시대였다. 아버지와 사이가 나빴던 데다 아버지를 좌지우지하는 소렐을 미워했던 아들 루이 11세가 독살했다는 설도 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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