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保守)’는 근대 초 일본에서 ‘conservative’의 번역어로 채택한 말이다. ‘보수’가 등장하기 전에는 ‘conservative’의 번역어로 ‘수구(守舊)’라는 말이 쓰였다. ‘수구’가 처음 등재된 사전은 중국에서 발행한 로브샤이트(W. Lobscheid)의 ‘영화자전(英華字典, 1866)’이다. 이 사전에서는 ‘수구’라는 대역어 아래 ‘수구법자(守舊法者)’, ‘수구지리(守舊之理)’ 등을 제시했는데, 이는 ‘보수주의자’, ‘보수의 원리’ 등과 같은 말이다. 그렇다면 ‘수구’라는 낱말이 쓰이고 있었음에도 왜 굳이 그와 비슷한 의미의 ‘보수’를 따로 만들어 쓰게 되었을까? ‘보수’라는 말이 만들어진 이유는 ‘보수’의 등장 이후 ‘수구’와 ‘보수’가 쓰이는 맥락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이 당시 한중일 세 나라에서 수구’는 봉건적 문화와 제도를 고수하는 경향을 나타내는 데 주로 쓰이고, ‘보수’는 서구의 정치 이념을 가리키는 데 쓰였던 것이다.
19세기 말의 신문에서 ‘수구당(守舊黨)’ 혹은 ‘수구파(守舊派)’는 개화와 개혁에 반대하는 기득권 세력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 반면, ‘보수당(保守黨)’ 혹은 ‘보수파(保守派)’는 서구 정치 제도 내의 정당이나 세력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보수’가 정치 용어로서 ‘진보’의 상대어로 쓰였다면, ‘수구’는 ‘개화’에 반대하는 현실 대응 방식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던 것이다. ‘개화한 생각’과 ‘수구한 생각’이란 표현이 자연스럽게 쓰인 것도 이 때문이다.
‘수구’와 ‘보수’가 이러한 의미와 용법으로 쓰이게 되면서, ‘수구’에는 ‘퇴행’의 의미만 남게 되었다. ‘수구 보수’라는 익숙한 듯 어색한 표현에서 우리는 쪼그라질 대로 쪼그라진 ‘수구’의 의미를 목도한다.
/최경봉 원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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